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5.5. ~ 1883.3.14.

마르크스

 



철학의 역사에는 체계를 만드는 데 능한 자와, 그것을 부수는 데 능한자, 두 가지 유형의 철학자가 있는데, 마크르스는 그 두가지를 다 잘했다. 흔히 아는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세계 지도를 양분한 거대 이념이다. 좁은 의미로서의 철학의 틀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총망라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배웠고,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으며, 그 무렵에 만난 평생 친구이며 동지인 엥겔스(1820-1895)의 권유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고 그의 필생의 대작 [자본론]을 완성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철학은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흔든 두 개의 역사적 사건, 곧 프랑스 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대한 독일 철학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처럼 사회의 모든 악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에서 비롯된다고 바라본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공동체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문명 이전의 상태로 상정되는 자연상태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상적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타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한 낭만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명명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공산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 짓는가? 지배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도 그 차이를 인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과학과 사회법칙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를 향해, 특히 지배 계급을 향해 사회개혁을 호소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은 그들이 아직 유토피아적 명제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게 바뀌라고 호소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이 계급 대립을 초월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통한 공산주의 실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속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우리 스스로의 모순부터 개선해서 뭉치자는??) 그래서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웅변조로 외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 공산주의에 또 다른 이름을 하나 붙여주었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다.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달리 ‘과학’이 될 수 있는 근거로 ‘역사적 유물론’을 거론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붙인 이름이다.)


역사적 유물론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헤겔의 철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을 180도 거꾸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헤겔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정신의 다른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이다)

 마르크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은 인간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물질이 아니다, 역사를 유물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훔볼트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베를린 대학의 현관 벽에 붙어있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유물론의 성격은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사유의 진리, 다시 말하면 사유의 현실성과 힘은 실천의 문제다”.


엥겔스




헤겔은 역사를 전개하는 원동력을 정신으로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생산력을 꼽았다. 모든 시대는 생산력의 성격에 부합하는 생산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생산 관계가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조응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는 항상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면 위기가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생산 관계가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질곡이 되면 사회혁명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생산 관계에는 다섯 가지 기본 양식이 존재한다. 원시 공동체, 노예제도, 봉건제도,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노동 가치의 착취가 사회혁명을 일으킨다는 마스크스가, 지금 세상에 살면 뭐라고 할까? 점심 밥은 굶어도 커피는 스타벅스 마시는ㅋㅋ)


결국, 마르크스 이야기는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성의 이야기다. 또 뻔한 말이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점도 있고 허점도 있는 철학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난 어린 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진을 볼때마다 늘 마르스크를 엥겔스로 생각하고, 엥겔스를 마르크스로 착각했다.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인 마르크스는 깡마르게 생겼을 것이고, 부유한 엥겔스는 넙적 둥그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편견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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