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하기/ 제 1권

 

 『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알에이치코리아, 2014.

 

 

1장, 진보는 시끄러운 깡통

2장, 보수는 답답한 꼴통

3장, 현실정치 똑바로 보기

4장, 정치는 우리 삶의 문제이다

 

P13/보수는 부패 때문에 망하고 진보는 분열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부패는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친 기업쪽, 돈이 도는 동네에는 여유가 있고 그것을 만지다보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타성에 젖어 부패로 가기 쉽다. 반면 없는 쪽, 기업이나 재벌과 거리가 먼 동네에는 부패할 거리조차 없다.

그러면 진보는 왜 분열할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토대를 둔 보수는 현재 눈에 보이는 길을 가면 그만이지만, 진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외쳐야 한다. 누가 옳은지 어찌 알수 있겠는가, 정답이 없으니 주장도 제각각이다. 이것이 어쩔수 없는 진보의 특성이다.

 

P17/ 보수는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진보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모른다. 민간이 불법사찰, 국정원 개혁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보수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내게 닥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 뿐이다. 진보가 그들의 삶에 득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싸워줘야 저들이 내편을 들어주는구나하고 힘을 보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정국이 보수가 짜놓은 틀대로 흘러가는 데에는 진보 세력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

 

P18/ 미국의 정치학자 E.E.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말했다. 정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만약 나만 옳다고 확신한다면 민주주의는 필요없다.

 

진보는 자신이 옳은 쪽, 선한쪽이라는 믿음이 교조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보 진영에 팽배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거 때마다 어떻게 박근혜에게 표를 줄수 있느냐식의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유권자에게 투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관점이 아닌 누가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가리는 관점에서 왜 박근혜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대중을 욕할 것이 아니라, 진보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35/ 김대중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사회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처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되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상인처럼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인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P67/ 민생 없이 개혁 없다

 

P77/ 안철수 모범생 말고 모험생이 되어라/문제는 리더십이다, 자기극복의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약점들을 스스로 대오 각성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103/ 문재인은 착한 후보였다. 선한 눈망울과 따스한 인상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이미지와 선한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정치는 단순한 선의가 아닌 실행 가능한 리더십과 게임플랜, 그리고 비전과 사람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선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착하되 좋은 후보가 아니었다면, 문재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세력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평범한 국회의원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정치인이 몰락하는 것은 외부적 변수 때문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외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 안에서 곪아터져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한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극복, 자기성장의 진통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한 차원 높은 정치로 가지 못한다.

 

P107/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사림, 그중에서도 노론이 대한민국 보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중 300년 가까이 집권한 노론은 조선 말 나라를 잃자 곧 친일파로 변신한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중심의 통일 노선과 충돌하는 이승만 중심의 단정 노선의 주축이 되는데 이들이 바로 친미세력을오 발전한다. 이처럼 노론, 친일, 단정, 친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력이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 보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로 들어오며 이들은 성장이란 아젠다를 앞세워 산업화 세력으로 발전한다.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보수의 존재 이유가 됐다.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다. 그들은 스스로 정통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보수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가 되고 있다. 이런 낡은 가치관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이끌어갈 수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P151/1인자의 리더십과 2인자의 리더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는 단 한명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게 혼자서 다 할수 없는게 이치다. 그래서 좋은 리더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2인자는 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도 정도전과 황희, 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바로 2인자에 속한다. 이성계와 정도전 중 과연 누가 조선 왕조의 창업을 주도했을가?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왕, 1인자는 이성계가 됐다. 또 유비를 촉나라의 왕으로 만든 것은 제갈공명이다. 그가 없었다면 언감생심 유비는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지도자는 옆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한지의 유방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유방은 동네에서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건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전략 참모 장량, 행정 참모 소하, 전쟁 참모 한신을 만나 한 왕조를 세웠다. 유방 스스로도 못난 자신이 귀족의 아들인 항우를 한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떤 것은 이 세사람을 곁에 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264/이젠 주연만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다. 역할은 조연이지만 그 개성이나 존재감, 인기는 주연을 앞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도 이제는 sns를 통해 거대 매스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수평적 네트워크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엔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권위주의나 일방적 강요는 먹혀들기 어렵다. 따라서 리더십도 시대 흐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유재석이 보여주는 진행 스타일(부드러운 카리스마),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리더십 스타일은 시대 흐름에 정확하게 부합해야 한다.

 

백조가 물 위에 떠 있으면 물 위는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물 아래는 정신없이 바쁘다. 푸른 호수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부유물이 떠다닌다. 정치 과정도 이와 같다. 더러운 연못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정치판도 온갖 귀찮고 더럽고 사소한 것들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가의 덕목이고 소양임을 알게 된다. 나 혼자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민주주의요,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의 위험은 중독성에 있다. 권력은 손잡이 없는 칼과 같아서 만지는 사람의 손을 베고 만다. 유능한 정치인은 악마와 계약을 맺을 정도로 유연해야 하고 권모의기질도 가져야 하지만 그 위험에 잠식당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윤리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윤리는 보통 아예 악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지만 정치에서의 윤리는 악을 활용할 줄 알되 악에 물들지 않는 것, 바로 책임윤리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지란 말처럼 쉽지 않다. 지도자의 길이란 이처럼 어렵다. 인간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권력을 써야하는데, 그러다 보면 권력에 중독되어서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기 쉽다. 김종필은 권력은 50%만 써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 국민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처럼 냉철한 의식과 변별력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들은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다. 잘못된 지도자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뜻이 얼마든지 왜곡될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결국 국민보다는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 지도자 한 사람이 완벽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하겠는가, 지도자의 윤리적 감각이 튼튼하기를, 처음부터 뛰어난 행정능력을 지닌 사람이기를 기대하고 뽑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허망할 제도일 것이다. 그 결과는 고작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느날 갑자기 정치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는건 로또 당첨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정치가 달라지면 그때 정치에 관심을 갖겠다는 자세는, 쇠붙이가 썩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를 바꾸려면 보통의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정치인의 놀이로 왜곡돼지 않고 보통사람의 일상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멍하니 있으면 정치는 내 삶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바꾸려면, 우리 뭐라도 하자.

 

독재자 엄석대를 쫓아낼 담임선생님 같은 구세주는 세상에 없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라들이 좋은 유권자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자기 삶을 바꾸는 방식은 한계가 와 있다. 노력해도 안 된고 로또도 안 된다. 권위주의 시대처럼 출세한 지인에게 빌붙은 것도 별 소용이 없다. 이제는 사회적 해법밖에 없다. 사회적 해법의 핵심이 결국 정치다. 아니면 운동이다.

 

 

 이론서 나눔하기/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지라르의 욕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닮고 싶어하는 인물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광고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광고로 나올 때, 평소에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이내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그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연예인이 샀던 물건'이 된다.

지라르는 이 한마디 쉬운 명제를 위해서 아주 어려운 말로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논리를 펼친다. 전에는 학자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줄로 요약해주기만 바랬다. 그 한줄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듣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것은 사과다"라는 한줄의 명제만 듣고 싶었다. 그것이 사과가 되기 위하여, 어떤 씨앗에서부터, 어떤 토양과 어떤 시간을 거쳐 어떤 열매로 자라나서, 다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어, 이름을 얻어 세상에 공개되는지, 그것이 사과가 아닌 것에서 사과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고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학자들은 한줄의 명제를 얻어낸 그 과정을 풀이해서 정리해주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제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흠흠) 아래에 펼치는 해석들은 그것을 공부해서 정리한 작업이 되겠다.

1. 욕망의 개념:

욕망라캉에 의해 정신분석학의 핵심 용어로 부각된 개념으로서 이에 해당하는 프로이트의 용어는 소망(Wunsch)이다. 프로이트의 소망 개념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함께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인 욕망(desire)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캉의 욕망은 언어, 상징계의 작용으로 도입된 결여, 혹은 절대적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는 욕망은 항상 자신의 대상에서 빗나가며, 결여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소망 충족이 직면해야 하는, 무의식적, 역동적(dynamical) 갈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라캉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구조적(structural)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라캉은 욕망 속에 내재한 이러한 결여의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원용한다. 라캉에게 욕망은 결여를,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를 의미한다면, 요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될 것을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상징계에 속하고, 요구는 상상계에 속한다. 요구가 어머니의 절대적 "현존"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라면, 욕망은 그것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 욕망이다. 여기에서 ''라는 조사는 목적격과 주격으로 각각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인간은 타자 '' 욕망한다.(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여기에서 욕망의 대상은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달리 말하면 나에 대한 타자의 인정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라캉은 욕망이 인정 혹은 승인과 같은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인간은 타자''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인간(주체)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역시 욕망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나는 타자이다." 그러므로 라캉에서의 욕망의계, 상징계로의 진입은 타자에 의한 소외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기 라캉에게 욕망은 욕망과 향유의 두 개념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후기에 라캉은 대타자에 의한 소외로서의 욕망과 대타자로 인한 소외로부터 벗어난 만족으로서의 향유라는 개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소외의 극복은 결여로서의 욕망, 혹은 잉여 향유의 주체적 전유를 통해서 달성된다.

2. 욕망의 간접화

지라르는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삼각형으로 도식화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돈키호테가 스스로 되고자 욕망한 것은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이다. 그런데 그가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전설적인 기사를 모방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주체'라면 아마디스는 '중개자'이고 이상적인 기사는 '대상'이 된다. 돈키호테의 욕망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자연발생적인 '수직적 초월의 욕망'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중개자(médiateur)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간접화된 욕망"이다. 이처럼 중개자를 통해서 암시를 받고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 삼각형의 욕망 이론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주체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부른다. 지라르는 이 이론을 통해 현대 시장경쟁 체제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욕망을 설명하려 한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개자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주체대상이 있을 뿐이어서 소설의 주인공이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에 대한 욕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이 경우에 그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것은 간단한 직선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욕망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무의식의 표현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직선 위에 주체와 대상을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삼각형의 욕망이 또 있다. 돈키호테를 중개자로 삼는 판초이다. 물론 산초의 욕망에는 돈키호테를 모방한 욕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돈키호테를 통해 자기가 통치자가 될 하나를, 자기 딸이 공작부인 칭호를 얻는 욕망을 갖는다. 물론 그러한 욕망들을 산초에게 암시해 준 것은 돈키호테이다. 이 경우에 흔히 중개자의 영향이 작용하는 순간부터 현실감각은 사라지고 판단력은 마비된다. 이러한 경우를 "욕망의 간접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저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체와 대상만을 설정한 소설에 익숙한 낭만적 독자들은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 사이에 있는 대립관계 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러한 대립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중개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중개자를 설정하지 못한 소설을 "낭만적 거짓"으로 보고, 삼각형 욕망을, 즉 중개자의 영향이나 중개자에 대한 모방이나 복사를 설정한 경우를 "소설적 진실"로 파악했다.

3.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

외면적 간접화는 라캉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면,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하는 방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내면적 간접화는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라르는 스탕달의 복사와 모방을 "허영심"으로 규정한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지 못하고 타인에게서 빌려온다. 허영심은 그 대상의 명성이나 부를 모방한다. 이 경우 중개자는 경쟁자가 되어 그 경쟁자의 실패를 기대한다.

돈키호테와 산초와의 물리적인 거리는 인접해 있지만 정신적 거리가 떨어져 있고, 그 둘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 주인의 욕망의 대상을 하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는 외면적 간접화이다.

그러나 스탕달의 경우 주체와 중개자가 동일한 세계의 내부에 인접해 있다. 이를 내면적 간접화라고 한다. 외면적 간접화의 경우 중개자를 공개적으로 존경하고 스스로 그 제자임을 자처할 수 있지만, 내면적 간접화의 경우, 자랑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춘다. 주체는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갈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순종적인 존경심""가장 강렬한 원한"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된다. 존경심은 그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기 때문이고, 원한은 중개자가 경쟁 상대이고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오"라고 부른다, 이 증오를 지닌 주체는 자동적으로 증오심을 감추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증오한다.

그러나 주체는 중개자가 경쟁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맞서서 그 증오를 드러내기 위해 논리적인 순서나 시간적인 순서를 도치시킨다. 자신의 욕망이 경쟁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그 때문에 그 불화의 책임이 경쟁자한테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질투나 선망도 원한이나 증오와 마찬가지로 내면적 간접화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래서 중개자를 틈입자나 난처한 자, 거북스러운 제삼자로 여긴다. 나아가 질투자는 오히려 자신을 불행한 희생자로 자처한다.

대상을 보고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욕망을 일깨웠을 뿐이지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욕망이 중개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언제나 간접화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중개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개자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종속이 강화될 뿐이다. 욕망의 근원이나 주체와 중개자와의 상관성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소설은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그것이 중개자가 없는 진정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욕망의 주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이다. 중개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을 소설적 진실이라고 하는 이유는 욕망이 간접화되어 그 욕망이 가짜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라는 것이다.

 4. 죽음과 수직적 초월

욕망의 진실은 죽음이지만, 죽음은 소설의 진실은 아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인 결말에서 멈추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결말들이 작위적이고 조급하며 소설작품의 겉치레로 사용되었다고 판단한다. 세르반테스의 결말 또는 스탕달의 소설의 결과 역시 죽음에서의 전환이다. 돈키호테는 그의 기사들을 버리고, 쥘리앵은 그의 반항을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초인을 단념한다.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 형이상학적 욕망 포기에 있다. 죽어가는 주인공은 그의 중개자를 부정한다. 중개자를 부인한다는 것은 신성 포기하는 일이며, 자만심 포기하는 일이다. 주인공의 육체적인 쇠퇴는 자만심의 패배를 표현하는 동시에 감춘다신성을 포기함으로써 주인공은 예속도 포기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전도가 일어나고, 형이상학적 욕망의 모든 결과가 그 반대의 결과로 바뀐다. 거짓말은 진실로, 고뇌는 추억으로, 동요는 안정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모욕은 겸손으로, 타인을 모방한 욕망은 자신에게서 우러난 욕망으로, 굴절된 초월 수직적 초월 대체된다.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결말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언제나 진정한 전환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스탕달은 주관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호주관적 면을 더 강조한다. 쥘리앵은 고독을 획득하지만 고립을 이겨낸다. 반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결말에서 고립을 이겨내지만 고독을 쟁취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맛보지 못하던 평화를 느낀다.

소설의 결말들 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대립보다는 강조의 이동이 중요하다. 차이점을 강조하면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을 놓쳐버리기 쉽다.

낭만적 비평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을 거부한다. 즉 형이상학적 욕망을 초월하여 죽음 너머로 빛을 내뿜은 소설의 진실로 향하기를 거부한다. 주인공은 진실에 도달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자신의 선견지명을 유산으로 남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이겨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인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주인공과 그의 창조자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분리되어 있다가 결말에서 서로 합쳐진다. 죽어가면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피상적인 것과 의미심장한 것,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의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소설작품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위계는 우리에게 작품의 본질적인 어떤 면을 볼 수 없게 해준다. 우리는 소설가가 기독교인이 아닐 경우 이 상징주의를 순전히 장식적인 역할로 간주하고, 소설가가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순전히 호교론적으로 본다. 정말로 과학적인비평이라면 선험적인 모든 판단을 버리고 소설의 다양한 결말들간의 놀라운 일체에 주목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편견인 찬반이 미학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 사이에 방수 격벽을 세우지 못한다면, 새롭게 조명된 창작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종교적 문제를 피상적으로 논의하지 말되, 가능하면 그것을 순전히 소설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재미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연구』,

최미정, 인터북스, 2010.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p51 각기 다른 이민의 시기와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의식이란 바로 경계인, 이방인 의식이다. 뿌리 뽑힘, 고향상실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들의 작품은 삶의 뿌리가 뽑힌 고향상실자가 진정한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제자리이며 고향에이 동경과 회귀는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다. 고향상실자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복귀하려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기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것과 같다. 결국 근원의 문제, 동일성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와 같다.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고향은 주로 과거 지평위에 존재하며,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제시된다

고향은 미래 지평 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현재의 삶은 불안과 소외의 공간이다

새로운 고향 만들기가 중요하다

4명의 시인은 그들의 작품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뿌리 뽑힌 자로서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극복하고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1. 김정기 시인- 신앙을 통해 근원적 고향을 회복한다

 

가을날/ 한 잎 낙옆되어/ 나 태어난 땅위에/편히 누우리/

한솔기 바람 내 몸을 흔들어/ 인디안의 거친 들판이나/

대륙의 거친 진흙밭에/ 딩굴어/ 어둠으로 삭아진들/마지막 말 한마디 삼켜진들/어떠리

어디나/그 크신 분의 품이니/어떠리/어떠하리. -<낙엽되어> 전문

기독교는 지상의 모든 인간을 낙원을 상실한 자로 간주한다.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을 타향처럼 생각하며, 언젠가는 천국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소망한다. 그들은 모두 지상에서 천국이라는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도정에 있는 것이다. 시인은 종교를 통해, 잃었다고 발버둥 치며 슬퍼할 것도 없고 지금 가지고 있다고 영원히 내것인 양 놓치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도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시인은 고향과 타향을 가르지 않고, 스스로를 유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을 장소에 묶어둘 수도 있고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시인은 신앙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어디에도 자신이 쉴 땅이 없다고 토로했던 그가 이제는 모든 곳이 다 고향땅인 것 처럼 느낀다.

 

2. 최정자 시인 - 관계 맺음을 통하여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 획득

 

한국에서 떠나온지 십삼년/ 미국에서 살아온지 십삼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나의 강산은 변하고도 남았겠다/

이민 와서 십년 지나면/알러지에 걸린단다/ 나는 알러지에 걸렸을 뿐이다/

어제는 된장찌개/ 오늘은 김치찌개/ 앞으로 십년 넘어 더 산다더라도/ 같은 것을 먹겠지/

손톱발톱 머리카락까지 변함없는/ 오십 몇년전의 나/ 나는 한국이다/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나는 걷고 또 걷는다/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됨으로...-<나는 한국이다 1> 전문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에도 많은 지인이 생기고 그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시인은 혼자라는 소외의식 극복한다. 또한 헤어져 살던 가족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이제는 또 다른 서울, 즉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을 뉴욕에서 획득한다.

시인은 어디에서 살든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유전자를 지닌 한국 사람임을 당당히 선언하듯 말한다. 시인은 "내가 한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그리하여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된다"고 한다.

 

3. 김윤태 시인- '사랑'을 통해 타향에 뿌리를 내려 고향으로 만든다

 

민들레 씨앗이/ 날다가 내리면/

민들레는 거기서/ 집을 짓는다/ 불가사의는/ 이론으로 알 수 없는 신비/

세상은 어딜가나/ 정들면 고향이라 하여선지/

민들레는 거기서/ 꼭/

집을 짓고/ 노란 꽃을 피운다 - <이민> 전문

민들레 씨앗은 그것이 날아온 곳이 고향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어세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는 가이다. 시인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어딜 가나 고향"이라고 한다.

이민자의 삶은 마치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것처럼 늘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다. 타지에서 오래 산다고 그곳이 고향이 되는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굳에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시인은 낯설겜ㄴ 여겨졌던 세상과 인간에 대해 점차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늘 손님처럼 떠돌던 삶도 차츰 뿌리를 내려 안정감을 갖게 된다.

 

4. 장석렬 시인- 자아와의 화애 및 고향 모색

 

봄이 가까이 오면 이곳에도 샛바람 끼어 불어/ 꽃 피는 한 철 분주가 시작된다/ 겨우내 먼 길 걸어와 피곤한 사람들/ 그러나 외길이었기에 눈망울은 맑다/ 대륙과 섬 사이를 멋대로 오가는 갈매기 보며/ 두고온 반쪽 하늘과/ 거기 어두운 구름의 얼굴을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조국은 영원 저쪽의 이름/ 밤새워 애처롭게 소중하게 붙들고 온 것 같은데/ 지금은 깨어난 꿈조각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낯선 색깔의 얼굴들이 낯선 바람을 안고 도는/ 직각의 거리 모퉁이에 서서/ 작고 따뜻한 소원들이 아랫목 온돌같이 무르익는/ 둥근 치마 저고리의 넉넉한 공간을 생각한다/ 이 거리 어느 곳 나의 발목 굳게 세워볼/ 낯익은 온기를 기대하는 무작정 같은 희망/ 머리를 숙이면 강물 흐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고/ 어디쯤일까, 강물처럼 가다보면 닿게 될/ 안마당 꽃향기 가득한 대문간이/ 멀리 고향 봄하늘 보푸라기처럼 뽀얗게 떠오른다- <입춘 외길> 전문

70년대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고향상실을 경험한 시인에게 고향은 고향으로서의 의미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려 더 이상 실제적인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시인은 타향의 고향화를 통해 고향을 모색한다.

구세계와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고향 모색, 이는 앞선 세명의 시인의 고향과의 연결 속에서, 고향을 닮은 '타향의 고향화'를 만드는 것과 다르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다를까 ??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5.5. ~ 1883.3.14.

마르크스

 



철학의 역사에는 체계를 만드는 데 능한 자와, 그것을 부수는 데 능한자, 두 가지 유형의 철학자가 있는데, 마크르스는 그 두가지를 다 잘했다. 흔히 아는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세계 지도를 양분한 거대 이념이다. 좁은 의미로서의 철학의 틀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총망라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배웠고,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으며, 그 무렵에 만난 평생 친구이며 동지인 엥겔스(1820-1895)의 권유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고 그의 필생의 대작 [자본론]을 완성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철학은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흔든 두 개의 역사적 사건, 곧 프랑스 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대한 독일 철학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처럼 사회의 모든 악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에서 비롯된다고 바라본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공동체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문명 이전의 상태로 상정되는 자연상태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상적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타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한 낭만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명명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공산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 짓는가? 지배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도 그 차이를 인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과학과 사회법칙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를 향해, 특히 지배 계급을 향해 사회개혁을 호소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은 그들이 아직 유토피아적 명제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게 바뀌라고 호소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이 계급 대립을 초월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통한 공산주의 실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속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우리 스스로의 모순부터 개선해서 뭉치자는??) 그래서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웅변조로 외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 공산주의에 또 다른 이름을 하나 붙여주었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다.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달리 ‘과학’이 될 수 있는 근거로 ‘역사적 유물론’을 거론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붙인 이름이다.)


역사적 유물론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헤겔의 철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을 180도 거꾸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헤겔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정신의 다른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이다)

 마르크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은 인간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물질이 아니다, 역사를 유물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훔볼트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베를린 대학의 현관 벽에 붙어있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유물론의 성격은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사유의 진리, 다시 말하면 사유의 현실성과 힘은 실천의 문제다”.


엥겔스




헤겔은 역사를 전개하는 원동력을 정신으로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생산력을 꼽았다. 모든 시대는 생산력의 성격에 부합하는 생산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생산 관계가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조응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는 항상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면 위기가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생산 관계가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질곡이 되면 사회혁명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생산 관계에는 다섯 가지 기본 양식이 존재한다. 원시 공동체, 노예제도, 봉건제도,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노동 가치의 착취가 사회혁명을 일으킨다는 마스크스가, 지금 세상에 살면 뭐라고 할까? 점심 밥은 굶어도 커피는 스타벅스 마시는ㅋㅋ)


결국, 마르크스 이야기는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성의 이야기다. 또 뻔한 말이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점도 있고 허점도 있는 철학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난 어린 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진을 볼때마다 늘 마르스크를 엥겔스로 생각하고, 엥겔스를 마르크스로 착각했다.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인 마르크스는 깡마르게 생겼을 것이고, 부유한 엥겔스는 넙적 둥그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편견때문에 !)

 『재일한인 작가의 디아스포라 글쓰기』

- 윤정화, 혜안, 2012

 

 

재일한인 작가의 디아스포라 글쓰기



재일한인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해주는 공간이라는 공통항을 끝없이 모색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조건이 지속되는 한 타자로서 느끼는 배제와 그로 인한 부유의 서사는 지속될 것이다. 자신의 거주 공간에 대한 의식의 변모 과정은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를 통해 서사적으로도 재현되며 이 공간에 대한 인물의 기억과 문학적 형상화의 변화가 현재까지의 재일한인작가의 의식세계의 주조를 형성하고 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재일 한인작가 1세들:
차별과 빈곤의 일상으로 고통 받으면서 정주지의 외부에서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상상하며 살았다. 이들은 조국에 대한 동경과 귀국에 대한 염원으로 상상으로 구축된 조국을 역사적 서술 공간 속에서 형상화한다.- 역사소설에서 구성된 디아스포라 주체는 조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당위적 의무로 인식하고 영웅적인 인물들을 쓴 위인전을 생산하여 차별로 인한 내면화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1970년대 이후 재일한인 2세대들:
전세대의 불우와 사회의 배제로 인해 고통 받는 부모로부터 내부 공간인 ‘집’에서도 안온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외부와 내부에서 이중적 억압을 경험하면서 민족의 역사에 의지하기보다 개인의 회상으로 구성된 유년의 시 공간속으로 회귀하게 된다. 재일한인 2세대는 사회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면서도 또한 위장을 하며 사는 자신을 자책하여 전 세대보다 더 큰 고뇌로 ‘말할 수 없는 자의 주체’로서 자신을 표상한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회성, 김학영은 『다듬이질 하는 여인』, 『우리 청춘의길목에서』, 『반쪽발이』, 『人面岩』, 『죽은 자가 남긴 것』, 『얼어붙은 입』, 『錯迷』, 『외등없는 집』, 『알콜 램프』에서 공통의 서사를 창출한다

80년대 이후 현재 재일한인 3세대:
과거보다는 현재적 시간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80년대 이후의 재일한인은 스스로의 모호한 정체성을 증언하는 것으로 차별에 저항하고 있다. 존재하나 부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존재로서 파악되어 온 자신의 타자성을 차이의 집단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외부에서 내부로 경계를 넘고 있다.

 

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작품을 발표한 양석일· 이기승· 이양지· 유미리· 현월의 『피와 뼈』,『달은 어디에 떠 있나(택시광조곡)』,『잃어버린 도시』,『나비타령』『Y의 초상』,『해녀』,『각(刻)』,『유희』,『그림자 없는 풍경』,『한여름』,『물고기의 축제』,『해바라기의 장례』,『가족시네마』,『그늘의 집』,『나쁜 소문』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견된다.

이들은 우선 호스트랜드와 홈랜드 양쪽 모두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민족적 호명’인 ‘조선인’, ‘한국인’의 기표를 거부한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민족이나 국적의 호명이 사라지고 이들의 차이적 정체성이 이주공간의 혼종성을 드러내는 경계적 명칭으로 다양하게 표명되며 자신을 표상하는 이름을 창조한다. 이들은 현실에서 도주하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사유행위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증언한다.

 

이들이 도달한 타자적 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타자로서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최고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회상으로 과거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의 시점에서 그 기억의 유의미성을 탐구한다. 즉 자신들이 위치해 있는 무공간의 현재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공간의 의미를 찾아낸다.

이 세대에 이르러 ‘디아스포라’라는 부정적인 상황적 조건은 단지 부정적인 현상적 조건으로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정체성을 모색하는 새로운 차원의 ‘디아스포라’로 적극적으로 전환된다. 실천적 행위로서의 글쓰기로 인해 생존이라는 최고의 목표 앞에서 존재를 입증하고 증명함으로써 외부에 부재하는 존재로서가 아닌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3의 종족으로서 재일한인은 거듭나고 있다. 여러 장르의 경계를 넘어가며 글을 쓰는 선택적 행위는 새로운 자아를 탐색하는 의식과정과도 연관되는 의의를 획득한다.

결론적으로
재일 한인작가들의 글쓰기는 민족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개인으로 응축되는 주체를 표현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침잠과 내면화의 과정이 아니라 결국 ‘재일한인’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정립해 내는 생산적 행위임이 밝혀진다. ‘변환’은 새로운 주체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절대명제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은 글쓰기의 형식적 변환과도 연동되고 있음을 본고에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기타 참고 내용

재일한인의 문학은 위에서 언급한 디아스포라의 의식 양상을 감안할 때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특정한 경계, 사이에서 삶을 영유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존재인 재일한인이 현재에 이르러 호미바바가 말하고 있는 혼종의 공간속에서 생존을 위해 변증법적으로 완결된 혼종성이 아닌, 공존하는 혼종성66), 무수한 주체의 정체성, 이미지간의 끊임없는 경쟁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뒤엉킴과 연계의 양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일한인은 한국에서부터 집단적인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정주지에서 타자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동시에 배제당하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라는 자기규정은 모든 문화가 실천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70)라고 하였다.

p81 각주 : 정치적인 망명으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없는 작가 살만 루시디는 ‘나와 내가 서술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흘러간 시간과 이민이라는 이중의 차단막이 놓여 있었다.(중략) 나의 일은 더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우리가 현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억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지음 , 변학수 백설자 채연숙 옮김, 『기억의 공간』, 363쪽

‘정체성은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동일성과 통일성’이라고 할 때 재일한인의 정체성은 지속적인 동일성을 확보할 공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안과 모호함을 함의하게 된다. 따라서 재일한인의 글쓰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규정하기 위한 자기실천의 글쓰기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고 기억의 공간이 어떻게 서사적으로 재현되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밝히는 잣대가 된다

호미바바는 기억이란 ‘결코 성찰과 회고의 고요한 행위가 아니며, 고통스러운 재구성이자 현재의 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해체된 과거를 한데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디아스포라적 주체가 기억에 대응하는 양식에 주목해야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재현해 내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이산자의 의식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매개로 하고 그것을 거치지 않으면 만들어질수 없다.’ 정체성을 만들 때 철저히 배제되는 타자를 다시 한 번 제시해야만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별, 민족, 계급 등에 따른 배제와 타자화에 의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부여받듯이 글쓰기 역시 이 같은 구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타자화의 조건인 디아스포라라는 현실적 조건이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작가의 기억과 공간의식, 공간을 이동하는 행위의 층위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에 대한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각주 312, 사르트르는 “언어는 근원적으로 대타존재이다.”라는 명제를 제출한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주체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타자를 ‘언어에 의미를 주는 존재’로서 체험하게 된다. 그 결과 주체는 자신의 언어가 타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의미를 전하고 있는지, 자신이 의미있는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의미가 타자에게서 실현된다고 하는 것은 발화 주체가 의도한 바와 타자에게서 실현된 의미사이에 괴리와 낙차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할 때 언어기호가 주체의 의식 속에 현전하고 있는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해지며, 언어기호와 지시대상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회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가, 타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타자가 받아들인 의미 역시 고정된 지시대상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의미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체가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을 때 발생했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취향의 정치학-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부르디외, 홍성민, 현암사, 2012.

 

피에르 부리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홍성민 지음


p38 부르디외의 서문은 칸트에 대한 비반으로부터 시작한다.

플라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창조, 예술이란 결국 자연을 모방할 뿐(재현),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이데아의 세계가 보편자로서 존재

아리스토텔레스

모방은 인간의 창조적 본능, 자연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예술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즐거움.

사물내에 개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바로 보편성을 갖는다

보편성과 개체성의 대립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논쟁의 핵심 대상이었다.

근대 사상사에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

 

칸트


● 개인들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일차적으로 감각판단에 의존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개체적인 감각판단은 반성적 판단으로 귀결되어 보편적 미학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개체적인 감각판단 → '반성적 판단' → 보편적 미학

그 이유를 칸트는 사람들은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시말하면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이 혹은 신분을 떠나, 똑같이 미적 쾌락을 느낄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순수 이성이 자연의 법칙과 같이 인간성에 본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판단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키는 공통감각은 인간 본연의 능력이라 본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이러한 칸트의 미학 이론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림이나 자연 풍광을 보면서 느끼는 감성들은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 계급적이란 말은, 한 사람의 미학적 취향이 교육과 훈련에 따라서 다르게 길들여진다는 점을 가리킨다. 게다가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으로 옳음/그름의 형식으로 작용하도록 강제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

미학적 판단의 궁극적 기원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

진리, 윤리, 미학은 완전히 분리된 서로 다른 영역이다

부르디외

미학적 판단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 / 미학적 취향은 현실세계에 대한 도덕-윤리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교육 수준의 정도가 예술에 대한 고급 취향/ 대중 취향을 구별하는 계기가 되며, 거꾸로 예술에 대한 취향이 계급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도 있다.

서로 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일상 생활의 실천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국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계급 지배를 유지시키고, 상층계급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기제이다. 이렇게 보면 한 사회에서 상식적인것으로 인정된 평가의 범주를 바꾸고 이를 통해서 사회 세계 자체를 바꾸는 것이 계급투쟁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

 

디아스포라의 지식인-현대 문화연구에 있어서 개입의 전술

레이초우 / 장수연, 김우영 옮김 / 이산 2005


p25/ 근대 서양 제국주의 역사에서 중국은 외국의 식민세력에 완전히 지배된 적이 없었다. 표면적으로 없었다고 해도 인민이 겪은 고난을 감안할 때 중국의 경우를 덜 '제3세계'인 것으로 볼수 없다.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민지배자는 그들 자신의 정부이다. 그들 자신의 체제와 그들 자신의 언어와 그들 자신의 문제를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지식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서양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며, 문화적 생산은 구조상 단순히 적대적이기보다는 나르시시즘적이다. 거기에 적대적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중국 유산, 중국의 전통, 중국정부" 그리고 이것들의 변종을 향한 적대감이다.

p31/ 마오주의자들은 프로이드와 라캉의 '결여' 개념을 이용하여, 암스트롱과 테넌하우스가 "표상으로서의 폭력"이라 부른 "타인을 대신해서 말하기를"정당화한다. '결여', '서발터니터', '희생'과 같은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들먹이면서 자신의 타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 결과적으로 피억압자에게서 항의와 정당한 요구의 말까지 박탈해버린다.

p33/ 디아스포라 의식이란 역사적 우연이라기보다는 지적인 현실, 즉 지식인이 처한 현실상황이 아닐까. 국경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타당성과 소유의 문제이다. 국경과 관련하여 실천할수 있는 일 하나는 현존하는 타당성의 개념을 파괴하고 대체하고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타당성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경개념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장(field)이라고하는 공간적 개념의 필수적 수반이다. '장'의 개념은 '헤게모니'(어떤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와 유사하다. 장의 형성은 자기 문화를 사회의 모든 수준에 전파할 수 있는 지배적 집단의 출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p40/ 2차 세계대전시기 중국과 영국은 자신이 필요할 때 홍콩에 재정적 또는 다른 형태의 원조를 요구했지만 홍콩인의 행복을 고려하진 않았다. 이러한 주변적 위치는 홍콩인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관찰자적 특권을 만들어내고 억압의 이상화에 회의를 품게 했다. (조선족도 관찰자적 특권을 갖고 있지 않을까?)

p 43/ 1997년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때, 홍콩은 '모국'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식민권력에 양도될 것이다.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란 용어는 원래 유대인의 민족적 이산(離散) 상황을 뜻하는 용어지만, 오늘날에는 전쟁·식민화의 역사나 경험과 깊이 결부된 난민·이민 상황을 가리키며, 본래의 의미보다 넓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제임스 클리퍼드는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 국민국가/동화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긴장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토착적, 특히 자생적 주장과도 긴장관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디아스포라는 끊임없이 현재 살고 있는 장소와 고향/고국 사이의 뒤엉킨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국경을 초월한 다른 문화와의 느슨한 절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지역의 역사나 문화의 본질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절충주의나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그 두 가지를 옹호하는 근대에 대항하여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성을 갖는 개념인 것이다.


레이 초우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홍콩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미국의 브라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홍콩인'으로서,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레이 초우는 자신이 '타자'로서 응시를 받아왔던 경험에 근거하여 '타자'의 시선으로 권력자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내 옷 밑에는 더 이상 드러낼 비밀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 비밀이란 건 너의 환상일 뿐이야"라고.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이 초우가 소개하는 자기의 경험이 반영된 에피소드 하나는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율을 느낄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논문은 한 학회에서 내가 불참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내 글에 대한 토론자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문화대혁명을 경험한 본토의 중국인]이었다. 그 발표문에서 나는 중국어를 번역하면서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이 실수를 꼬투리 잡아 그 토론자는 논문 전체를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청중에게 결국 "그녀는 홍콩 출신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이처럼 나의 지리적 기원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표명한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홍콩에서 온 이 서양화된 중국여성, 이 문화적 사생아가 어떻게 중국과 중국지식인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만약 내가 중국을 대표한다거나 진정한 중국인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면 수치심에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숨어 있는 문화적 폭력을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어야만 했다. 중심주의적인 거대한 억압을 경험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와 같은 사람이 그런 중심주의의 영속화에 그토록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현대중국과 오늘날 그 밖의 모든 지식인이 도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전략화된 현실의 으뜸가는 예이다. "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우리의 주변에도 이런 문제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실업자, 특정지역, 그 밖의 수많은 소수자—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미셸 푸코의 말처럼 지식인을 권력의 대상이자 도구로 전환시키려는 권력형태에 맞서서 저항할 수 있는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스스로를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지식인조차도 자신의 학식과 말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지식권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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