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연구』,

최미정, 인터북스, 2010.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p51 각기 다른 이민의 시기와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의식이란 바로 경계인, 이방인 의식이다. 뿌리 뽑힘, 고향상실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들의 작품은 삶의 뿌리가 뽑힌 고향상실자가 진정한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제자리이며 고향에이 동경과 회귀는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다. 고향상실자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복귀하려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기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것과 같다. 결국 근원의 문제, 동일성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와 같다.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고향은 주로 과거 지평위에 존재하며,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제시된다

고향은 미래 지평 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현재의 삶은 불안과 소외의 공간이다

새로운 고향 만들기가 중요하다

4명의 시인은 그들의 작품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뿌리 뽑힌 자로서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극복하고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1. 김정기 시인- 신앙을 통해 근원적 고향을 회복한다

 

가을날/ 한 잎 낙옆되어/ 나 태어난 땅위에/편히 누우리/

한솔기 바람 내 몸을 흔들어/ 인디안의 거친 들판이나/

대륙의 거친 진흙밭에/ 딩굴어/ 어둠으로 삭아진들/마지막 말 한마디 삼켜진들/어떠리

어디나/그 크신 분의 품이니/어떠리/어떠하리. -<낙엽되어> 전문

기독교는 지상의 모든 인간을 낙원을 상실한 자로 간주한다.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을 타향처럼 생각하며, 언젠가는 천국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소망한다. 그들은 모두 지상에서 천국이라는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도정에 있는 것이다. 시인은 종교를 통해, 잃었다고 발버둥 치며 슬퍼할 것도 없고 지금 가지고 있다고 영원히 내것인 양 놓치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도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시인은 고향과 타향을 가르지 않고, 스스로를 유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을 장소에 묶어둘 수도 있고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시인은 신앙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어디에도 자신이 쉴 땅이 없다고 토로했던 그가 이제는 모든 곳이 다 고향땅인 것 처럼 느낀다.

 

2. 최정자 시인 - 관계 맺음을 통하여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 획득

 

한국에서 떠나온지 십삼년/ 미국에서 살아온지 십삼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나의 강산은 변하고도 남았겠다/

이민 와서 십년 지나면/알러지에 걸린단다/ 나는 알러지에 걸렸을 뿐이다/

어제는 된장찌개/ 오늘은 김치찌개/ 앞으로 십년 넘어 더 산다더라도/ 같은 것을 먹겠지/

손톱발톱 머리카락까지 변함없는/ 오십 몇년전의 나/ 나는 한국이다/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나는 걷고 또 걷는다/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됨으로...-<나는 한국이다 1> 전문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에도 많은 지인이 생기고 그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시인은 혼자라는 소외의식 극복한다. 또한 헤어져 살던 가족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이제는 또 다른 서울, 즉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을 뉴욕에서 획득한다.

시인은 어디에서 살든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유전자를 지닌 한국 사람임을 당당히 선언하듯 말한다. 시인은 "내가 한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그리하여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된다"고 한다.

 

3. 김윤태 시인- '사랑'을 통해 타향에 뿌리를 내려 고향으로 만든다

 

민들레 씨앗이/ 날다가 내리면/

민들레는 거기서/ 집을 짓는다/ 불가사의는/ 이론으로 알 수 없는 신비/

세상은 어딜가나/ 정들면 고향이라 하여선지/

민들레는 거기서/ 꼭/

집을 짓고/ 노란 꽃을 피운다 - <이민> 전문

민들레 씨앗은 그것이 날아온 곳이 고향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어세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는 가이다. 시인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어딜 가나 고향"이라고 한다.

이민자의 삶은 마치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것처럼 늘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다. 타지에서 오래 산다고 그곳이 고향이 되는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굳에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시인은 낯설겜ㄴ 여겨졌던 세상과 인간에 대해 점차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늘 손님처럼 떠돌던 삶도 차츰 뿌리를 내려 안정감을 갖게 된다.

 

4. 장석렬 시인- 자아와의 화애 및 고향 모색

 

봄이 가까이 오면 이곳에도 샛바람 끼어 불어/ 꽃 피는 한 철 분주가 시작된다/ 겨우내 먼 길 걸어와 피곤한 사람들/ 그러나 외길이었기에 눈망울은 맑다/ 대륙과 섬 사이를 멋대로 오가는 갈매기 보며/ 두고온 반쪽 하늘과/ 거기 어두운 구름의 얼굴을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조국은 영원 저쪽의 이름/ 밤새워 애처롭게 소중하게 붙들고 온 것 같은데/ 지금은 깨어난 꿈조각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낯선 색깔의 얼굴들이 낯선 바람을 안고 도는/ 직각의 거리 모퉁이에 서서/ 작고 따뜻한 소원들이 아랫목 온돌같이 무르익는/ 둥근 치마 저고리의 넉넉한 공간을 생각한다/ 이 거리 어느 곳 나의 발목 굳게 세워볼/ 낯익은 온기를 기대하는 무작정 같은 희망/ 머리를 숙이면 강물 흐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고/ 어디쯤일까, 강물처럼 가다보면 닿게 될/ 안마당 꽃향기 가득한 대문간이/ 멀리 고향 봄하늘 보푸라기처럼 뽀얗게 떠오른다- <입춘 외길> 전문

70년대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고향상실을 경험한 시인에게 고향은 고향으로서의 의미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려 더 이상 실제적인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시인은 타향의 고향화를 통해 고향을 모색한다.

구세계와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고향 모색, 이는 앞선 세명의 시인의 고향과의 연결 속에서, 고향을 닮은 '타향의 고향화'를 만드는 것과 다르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다를까 ??



 

 『재일한인 작가의 디아스포라 글쓰기』

- 윤정화, 혜안, 2012

 

 

재일한인 작가의 디아스포라 글쓰기



재일한인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해주는 공간이라는 공통항을 끝없이 모색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조건이 지속되는 한 타자로서 느끼는 배제와 그로 인한 부유의 서사는 지속될 것이다. 자신의 거주 공간에 대한 의식의 변모 과정은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를 통해 서사적으로도 재현되며 이 공간에 대한 인물의 기억과 문학적 형상화의 변화가 현재까지의 재일한인작가의 의식세계의 주조를 형성하고 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재일 한인작가 1세들:
차별과 빈곤의 일상으로 고통 받으면서 정주지의 외부에서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상상하며 살았다. 이들은 조국에 대한 동경과 귀국에 대한 염원으로 상상으로 구축된 조국을 역사적 서술 공간 속에서 형상화한다.- 역사소설에서 구성된 디아스포라 주체는 조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당위적 의무로 인식하고 영웅적인 인물들을 쓴 위인전을 생산하여 차별로 인한 내면화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1970년대 이후 재일한인 2세대들:
전세대의 불우와 사회의 배제로 인해 고통 받는 부모로부터 내부 공간인 ‘집’에서도 안온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외부와 내부에서 이중적 억압을 경험하면서 민족의 역사에 의지하기보다 개인의 회상으로 구성된 유년의 시 공간속으로 회귀하게 된다. 재일한인 2세대는 사회적으로 자신을 위장하면서도 또한 위장을 하며 사는 자신을 자책하여 전 세대보다 더 큰 고뇌로 ‘말할 수 없는 자의 주체’로서 자신을 표상한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회성, 김학영은 『다듬이질 하는 여인』, 『우리 청춘의길목에서』, 『반쪽발이』, 『人面岩』, 『죽은 자가 남긴 것』, 『얼어붙은 입』, 『錯迷』, 『외등없는 집』, 『알콜 램프』에서 공통의 서사를 창출한다

80년대 이후 현재 재일한인 3세대:
과거보다는 현재적 시간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80년대 이후의 재일한인은 스스로의 모호한 정체성을 증언하는 것으로 차별에 저항하고 있다. 존재하나 부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존재로서 파악되어 온 자신의 타자성을 차이의 집단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외부에서 내부로 경계를 넘고 있다.

 

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작품을 발표한 양석일· 이기승· 이양지· 유미리· 현월의 『피와 뼈』,『달은 어디에 떠 있나(택시광조곡)』,『잃어버린 도시』,『나비타령』『Y의 초상』,『해녀』,『각(刻)』,『유희』,『그림자 없는 풍경』,『한여름』,『물고기의 축제』,『해바라기의 장례』,『가족시네마』,『그늘의 집』,『나쁜 소문』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발견된다.

이들은 우선 호스트랜드와 홈랜드 양쪽 모두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민족적 호명’인 ‘조선인’, ‘한국인’의 기표를 거부한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민족이나 국적의 호명이 사라지고 이들의 차이적 정체성이 이주공간의 혼종성을 드러내는 경계적 명칭으로 다양하게 표명되며 자신을 표상하는 이름을 창조한다. 이들은 현실에서 도주하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사유행위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증언한다.

 

이들이 도달한 타자적 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타자로서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최고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회상으로 과거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의 시점에서 그 기억의 유의미성을 탐구한다. 즉 자신들이 위치해 있는 무공간의 현재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공간의 의미를 찾아낸다.

이 세대에 이르러 ‘디아스포라’라는 부정적인 상황적 조건은 단지 부정적인 현상적 조건으로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정체성을 모색하는 새로운 차원의 ‘디아스포라’로 적극적으로 전환된다. 실천적 행위로서의 글쓰기로 인해 생존이라는 최고의 목표 앞에서 존재를 입증하고 증명함으로써 외부에 부재하는 존재로서가 아닌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3의 종족으로서 재일한인은 거듭나고 있다. 여러 장르의 경계를 넘어가며 글을 쓰는 선택적 행위는 새로운 자아를 탐색하는 의식과정과도 연관되는 의의를 획득한다.

결론적으로
재일 한인작가들의 글쓰기는 민족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개인으로 응축되는 주체를 표현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침잠과 내면화의 과정이 아니라 결국 ‘재일한인’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정립해 내는 생산적 행위임이 밝혀진다. ‘변환’은 새로운 주체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절대명제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은 글쓰기의 형식적 변환과도 연동되고 있음을 본고에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기타 참고 내용

재일한인의 문학은 위에서 언급한 디아스포라의 의식 양상을 감안할 때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특정한 경계, 사이에서 삶을 영유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존재인 재일한인이 현재에 이르러 호미바바가 말하고 있는 혼종의 공간속에서 생존을 위해 변증법적으로 완결된 혼종성이 아닌, 공존하는 혼종성66), 무수한 주체의 정체성, 이미지간의 끊임없는 경쟁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뒤엉킴과 연계의 양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일한인은 한국에서부터 집단적인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정주지에서 타자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동시에 배제당하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라는 자기규정은 모든 문화가 실천하는 활동 가운데 하나’70)라고 하였다.

p81 각주 : 정치적인 망명으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없는 작가 살만 루시디는 ‘나와 내가 서술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흘러간 시간과 이민이라는 이중의 차단막이 놓여 있었다.(중략) 나의 일은 더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우리가 현재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억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지음 , 변학수 백설자 채연숙 옮김, 『기억의 공간』, 363쪽

‘정체성은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동일성과 통일성’이라고 할 때 재일한인의 정체성은 지속적인 동일성을 확보할 공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안과 모호함을 함의하게 된다. 따라서 재일한인의 글쓰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규정하기 위한 자기실천의 글쓰기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고 기억의 공간이 어떻게 서사적으로 재현되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밝히는 잣대가 된다

호미바바는 기억이란 ‘결코 성찰과 회고의 고요한 행위가 아니며, 고통스러운 재구성이자 현재의 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해체된 과거를 한데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디아스포라적 주체가 기억에 대응하는 양식에 주목해야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재현해 내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이산자의 의식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매개로 하고 그것을 거치지 않으면 만들어질수 없다.’ 정체성을 만들 때 철저히 배제되는 타자를 다시 한 번 제시해야만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별, 민족, 계급 등에 따른 배제와 타자화에 의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부여받듯이 글쓰기 역시 이 같은 구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타자화의 조건인 디아스포라라는 현실적 조건이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작가의 기억과 공간의식, 공간을 이동하는 행위의 층위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에 대한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각주 312, 사르트르는 “언어는 근원적으로 대타존재이다.”라는 명제를 제출한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주체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타자를 ‘언어에 의미를 주는 존재’로서 체험하게 된다. 그 결과 주체는 자신의 언어가 타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의미를 전하고 있는지, 자신이 의미있는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의미가 타자에게서 실현된다고 하는 것은 발화 주체가 의도한 바와 타자에게서 실현된 의미사이에 괴리와 낙차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할 때 언어기호가 주체의 의식 속에 현전하고 있는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해지며, 언어기호와 지시대상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회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가, 타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타자가 받아들인 의미 역시 고정된 지시대상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의미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체가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을 때 발생했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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