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하기/ 제 1권

 

 『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알에이치코리아, 2014.

 

 

1장, 진보는 시끄러운 깡통

2장, 보수는 답답한 꼴통

3장, 현실정치 똑바로 보기

4장, 정치는 우리 삶의 문제이다

 

P13/보수는 부패 때문에 망하고 진보는 분열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부패는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친 기업쪽, 돈이 도는 동네에는 여유가 있고 그것을 만지다보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타성에 젖어 부패로 가기 쉽다. 반면 없는 쪽, 기업이나 재벌과 거리가 먼 동네에는 부패할 거리조차 없다.

그러면 진보는 왜 분열할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토대를 둔 보수는 현재 눈에 보이는 길을 가면 그만이지만, 진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외쳐야 한다. 누가 옳은지 어찌 알수 있겠는가, 정답이 없으니 주장도 제각각이다. 이것이 어쩔수 없는 진보의 특성이다.

 

P17/ 보수는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진보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모른다. 민간이 불법사찰, 국정원 개혁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보수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내게 닥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 뿐이다. 진보가 그들의 삶에 득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싸워줘야 저들이 내편을 들어주는구나하고 힘을 보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정국이 보수가 짜놓은 틀대로 흘러가는 데에는 진보 세력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

 

P18/ 미국의 정치학자 E.E.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말했다. 정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만약 나만 옳다고 확신한다면 민주주의는 필요없다.

 

진보는 자신이 옳은 쪽, 선한쪽이라는 믿음이 교조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보 진영에 팽배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거 때마다 어떻게 박근혜에게 표를 줄수 있느냐식의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유권자에게 투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관점이 아닌 누가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가리는 관점에서 왜 박근혜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대중을 욕할 것이 아니라, 진보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35/ 김대중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사회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처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되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상인처럼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인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P67/ 민생 없이 개혁 없다

 

P77/ 안철수 모범생 말고 모험생이 되어라/문제는 리더십이다, 자기극복의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약점들을 스스로 대오 각성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103/ 문재인은 착한 후보였다. 선한 눈망울과 따스한 인상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이미지와 선한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정치는 단순한 선의가 아닌 실행 가능한 리더십과 게임플랜, 그리고 비전과 사람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선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착하되 좋은 후보가 아니었다면, 문재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세력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평범한 국회의원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정치인이 몰락하는 것은 외부적 변수 때문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외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 안에서 곪아터져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한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극복, 자기성장의 진통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한 차원 높은 정치로 가지 못한다.

 

P107/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사림, 그중에서도 노론이 대한민국 보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중 300년 가까이 집권한 노론은 조선 말 나라를 잃자 곧 친일파로 변신한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중심의 통일 노선과 충돌하는 이승만 중심의 단정 노선의 주축이 되는데 이들이 바로 친미세력을오 발전한다. 이처럼 노론, 친일, 단정, 친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력이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 보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로 들어오며 이들은 성장이란 아젠다를 앞세워 산업화 세력으로 발전한다.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보수의 존재 이유가 됐다.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다. 그들은 스스로 정통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보수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가 되고 있다. 이런 낡은 가치관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이끌어갈 수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P151/1인자의 리더십과 2인자의 리더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는 단 한명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게 혼자서 다 할수 없는게 이치다. 그래서 좋은 리더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2인자는 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도 정도전과 황희, 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바로 2인자에 속한다. 이성계와 정도전 중 과연 누가 조선 왕조의 창업을 주도했을가?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왕, 1인자는 이성계가 됐다. 또 유비를 촉나라의 왕으로 만든 것은 제갈공명이다. 그가 없었다면 언감생심 유비는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지도자는 옆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한지의 유방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유방은 동네에서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건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전략 참모 장량, 행정 참모 소하, 전쟁 참모 한신을 만나 한 왕조를 세웠다. 유방 스스로도 못난 자신이 귀족의 아들인 항우를 한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떤 것은 이 세사람을 곁에 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264/이젠 주연만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다. 역할은 조연이지만 그 개성이나 존재감, 인기는 주연을 앞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도 이제는 sns를 통해 거대 매스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수평적 네트워크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엔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권위주의나 일방적 강요는 먹혀들기 어렵다. 따라서 리더십도 시대 흐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유재석이 보여주는 진행 스타일(부드러운 카리스마),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리더십 스타일은 시대 흐름에 정확하게 부합해야 한다.

 

백조가 물 위에 떠 있으면 물 위는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물 아래는 정신없이 바쁘다. 푸른 호수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부유물이 떠다닌다. 정치 과정도 이와 같다. 더러운 연못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정치판도 온갖 귀찮고 더럽고 사소한 것들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가의 덕목이고 소양임을 알게 된다. 나 혼자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민주주의요,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의 위험은 중독성에 있다. 권력은 손잡이 없는 칼과 같아서 만지는 사람의 손을 베고 만다. 유능한 정치인은 악마와 계약을 맺을 정도로 유연해야 하고 권모의기질도 가져야 하지만 그 위험에 잠식당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윤리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윤리는 보통 아예 악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지만 정치에서의 윤리는 악을 활용할 줄 알되 악에 물들지 않는 것, 바로 책임윤리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지란 말처럼 쉽지 않다. 지도자의 길이란 이처럼 어렵다. 인간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권력을 써야하는데, 그러다 보면 권력에 중독되어서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기 쉽다. 김종필은 권력은 50%만 써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 국민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처럼 냉철한 의식과 변별력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들은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다. 잘못된 지도자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뜻이 얼마든지 왜곡될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결국 국민보다는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 지도자 한 사람이 완벽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하겠는가, 지도자의 윤리적 감각이 튼튼하기를, 처음부터 뛰어난 행정능력을 지닌 사람이기를 기대하고 뽑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허망할 제도일 것이다. 그 결과는 고작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느날 갑자기 정치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는건 로또 당첨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정치가 달라지면 그때 정치에 관심을 갖겠다는 자세는, 쇠붙이가 썩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를 바꾸려면 보통의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정치인의 놀이로 왜곡돼지 않고 보통사람의 일상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멍하니 있으면 정치는 내 삶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바꾸려면, 우리 뭐라도 하자.

 

독재자 엄석대를 쫓아낼 담임선생님 같은 구세주는 세상에 없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라들이 좋은 유권자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자기 삶을 바꾸는 방식은 한계가 와 있다. 노력해도 안 된고 로또도 안 된다. 권위주의 시대처럼 출세한 지인에게 빌붙은 것도 별 소용이 없다. 이제는 사회적 해법밖에 없다. 사회적 해법의 핵심이 결국 정치다. 아니면 운동이다.

 

 

 이론서 나눔하기/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지라르의 욕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닮고 싶어하는 인물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광고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광고로 나올 때, 평소에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이내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그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연예인이 샀던 물건'이 된다.

지라르는 이 한마디 쉬운 명제를 위해서 아주 어려운 말로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논리를 펼친다. 전에는 학자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줄로 요약해주기만 바랬다. 그 한줄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듣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것은 사과다"라는 한줄의 명제만 듣고 싶었다. 그것이 사과가 되기 위하여, 어떤 씨앗에서부터, 어떤 토양과 어떤 시간을 거쳐 어떤 열매로 자라나서, 다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어, 이름을 얻어 세상에 공개되는지, 그것이 사과가 아닌 것에서 사과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고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학자들은 한줄의 명제를 얻어낸 그 과정을 풀이해서 정리해주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제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흠흠) 아래에 펼치는 해석들은 그것을 공부해서 정리한 작업이 되겠다.

1. 욕망의 개념:

욕망라캉에 의해 정신분석학의 핵심 용어로 부각된 개념으로서 이에 해당하는 프로이트의 용어는 소망(Wunsch)이다. 프로이트의 소망 개념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함께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인 욕망(desire)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캉의 욕망은 언어, 상징계의 작용으로 도입된 결여, 혹은 절대적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는 욕망은 항상 자신의 대상에서 빗나가며, 결여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소망 충족이 직면해야 하는, 무의식적, 역동적(dynamical) 갈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라캉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구조적(structural)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라캉은 욕망 속에 내재한 이러한 결여의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원용한다. 라캉에게 욕망은 결여를,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를 의미한다면, 요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될 것을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상징계에 속하고, 요구는 상상계에 속한다. 요구가 어머니의 절대적 "현존"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라면, 욕망은 그것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 욕망이다. 여기에서 ''라는 조사는 목적격과 주격으로 각각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인간은 타자 '' 욕망한다.(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여기에서 욕망의 대상은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달리 말하면 나에 대한 타자의 인정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라캉은 욕망이 인정 혹은 승인과 같은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인간은 타자''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인간(주체)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역시 욕망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나는 타자이다." 그러므로 라캉에서의 욕망의계, 상징계로의 진입은 타자에 의한 소외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기 라캉에게 욕망은 욕망과 향유의 두 개념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후기에 라캉은 대타자에 의한 소외로서의 욕망과 대타자로 인한 소외로부터 벗어난 만족으로서의 향유라는 개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소외의 극복은 결여로서의 욕망, 혹은 잉여 향유의 주체적 전유를 통해서 달성된다.

2. 욕망의 간접화

지라르는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삼각형으로 도식화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돈키호테가 스스로 되고자 욕망한 것은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이다. 그런데 그가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전설적인 기사를 모방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주체'라면 아마디스는 '중개자'이고 이상적인 기사는 '대상'이 된다. 돈키호테의 욕망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자연발생적인 '수직적 초월의 욕망'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중개자(médiateur)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간접화된 욕망"이다. 이처럼 중개자를 통해서 암시를 받고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 삼각형의 욕망 이론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주체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부른다. 지라르는 이 이론을 통해 현대 시장경쟁 체제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욕망을 설명하려 한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개자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주체대상이 있을 뿐이어서 소설의 주인공이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에 대한 욕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이 경우에 그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것은 간단한 직선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욕망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무의식의 표현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직선 위에 주체와 대상을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삼각형의 욕망이 또 있다. 돈키호테를 중개자로 삼는 판초이다. 물론 산초의 욕망에는 돈키호테를 모방한 욕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돈키호테를 통해 자기가 통치자가 될 하나를, 자기 딸이 공작부인 칭호를 얻는 욕망을 갖는다. 물론 그러한 욕망들을 산초에게 암시해 준 것은 돈키호테이다. 이 경우에 흔히 중개자의 영향이 작용하는 순간부터 현실감각은 사라지고 판단력은 마비된다. 이러한 경우를 "욕망의 간접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저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체와 대상만을 설정한 소설에 익숙한 낭만적 독자들은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 사이에 있는 대립관계 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러한 대립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중개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중개자를 설정하지 못한 소설을 "낭만적 거짓"으로 보고, 삼각형 욕망을, 즉 중개자의 영향이나 중개자에 대한 모방이나 복사를 설정한 경우를 "소설적 진실"로 파악했다.

3.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

외면적 간접화는 라캉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면,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하는 방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내면적 간접화는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라르는 스탕달의 복사와 모방을 "허영심"으로 규정한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지 못하고 타인에게서 빌려온다. 허영심은 그 대상의 명성이나 부를 모방한다. 이 경우 중개자는 경쟁자가 되어 그 경쟁자의 실패를 기대한다.

돈키호테와 산초와의 물리적인 거리는 인접해 있지만 정신적 거리가 떨어져 있고, 그 둘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 주인의 욕망의 대상을 하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는 외면적 간접화이다.

그러나 스탕달의 경우 주체와 중개자가 동일한 세계의 내부에 인접해 있다. 이를 내면적 간접화라고 한다. 외면적 간접화의 경우 중개자를 공개적으로 존경하고 스스로 그 제자임을 자처할 수 있지만, 내면적 간접화의 경우, 자랑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춘다. 주체는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갈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순종적인 존경심""가장 강렬한 원한"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된다. 존경심은 그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기 때문이고, 원한은 중개자가 경쟁 상대이고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오"라고 부른다, 이 증오를 지닌 주체는 자동적으로 증오심을 감추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증오한다.

그러나 주체는 중개자가 경쟁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맞서서 그 증오를 드러내기 위해 논리적인 순서나 시간적인 순서를 도치시킨다. 자신의 욕망이 경쟁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그 때문에 그 불화의 책임이 경쟁자한테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질투나 선망도 원한이나 증오와 마찬가지로 내면적 간접화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래서 중개자를 틈입자나 난처한 자, 거북스러운 제삼자로 여긴다. 나아가 질투자는 오히려 자신을 불행한 희생자로 자처한다.

대상을 보고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욕망을 일깨웠을 뿐이지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욕망이 중개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언제나 간접화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중개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개자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종속이 강화될 뿐이다. 욕망의 근원이나 주체와 중개자와의 상관성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소설은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그것이 중개자가 없는 진정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욕망의 주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이다. 중개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을 소설적 진실이라고 하는 이유는 욕망이 간접화되어 그 욕망이 가짜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라는 것이다.

 4. 죽음과 수직적 초월

욕망의 진실은 죽음이지만, 죽음은 소설의 진실은 아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인 결말에서 멈추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결말들이 작위적이고 조급하며 소설작품의 겉치레로 사용되었다고 판단한다. 세르반테스의 결말 또는 스탕달의 소설의 결과 역시 죽음에서의 전환이다. 돈키호테는 그의 기사들을 버리고, 쥘리앵은 그의 반항을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초인을 단념한다.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 형이상학적 욕망 포기에 있다. 죽어가는 주인공은 그의 중개자를 부정한다. 중개자를 부인한다는 것은 신성 포기하는 일이며, 자만심 포기하는 일이다. 주인공의 육체적인 쇠퇴는 자만심의 패배를 표현하는 동시에 감춘다신성을 포기함으로써 주인공은 예속도 포기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전도가 일어나고, 형이상학적 욕망의 모든 결과가 그 반대의 결과로 바뀐다. 거짓말은 진실로, 고뇌는 추억으로, 동요는 안정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모욕은 겸손으로, 타인을 모방한 욕망은 자신에게서 우러난 욕망으로, 굴절된 초월 수직적 초월 대체된다.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결말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언제나 진정한 전환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스탕달은 주관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호주관적 면을 더 강조한다. 쥘리앵은 고독을 획득하지만 고립을 이겨낸다. 반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결말에서 고립을 이겨내지만 고독을 쟁취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맛보지 못하던 평화를 느낀다.

소설의 결말들 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대립보다는 강조의 이동이 중요하다. 차이점을 강조하면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을 놓쳐버리기 쉽다.

낭만적 비평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을 거부한다. 즉 형이상학적 욕망을 초월하여 죽음 너머로 빛을 내뿜은 소설의 진실로 향하기를 거부한다. 주인공은 진실에 도달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자신의 선견지명을 유산으로 남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이겨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인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주인공과 그의 창조자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분리되어 있다가 결말에서 서로 합쳐진다. 죽어가면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피상적인 것과 의미심장한 것,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의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소설작품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위계는 우리에게 작품의 본질적인 어떤 면을 볼 수 없게 해준다. 우리는 소설가가 기독교인이 아닐 경우 이 상징주의를 순전히 장식적인 역할로 간주하고, 소설가가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순전히 호교론적으로 본다. 정말로 과학적인비평이라면 선험적인 모든 판단을 버리고 소설의 다양한 결말들간의 놀라운 일체에 주목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편견인 찬반이 미학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 사이에 방수 격벽을 세우지 못한다면, 새롭게 조명된 창작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종교적 문제를 피상적으로 논의하지 말되, 가능하면 그것을 순전히 소설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잔디깎기

 

1. 잔디밭 관리

서울에 살 때는 일년에 한 두번 친구들이랑 양평에서 바베큐 파티 하면서, 그림같은 전원주택에서 매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잔디는 스스로 예쁘게 자라서, 알아서 파아랗게 그림을 만들어주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나서, 상상과 현실사이의 괴리는 생각외로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잔디밭 관리였습니다.

2. 잔디깎기 시기:

6월 1일날 올해 들어서 세번째로 잔디를 깎았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어지럽게 자라있습니다. 10년이 다 된 잔디밭이다 보니 곳곳에 다양한 잡초들도 참 많이 나있습니다. 게다가 잔디밭이 고양이들의 놀이터다보니 남들이 사용하는 잡초제거제도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뽑거나, 잔디깎기로만 관리를 하다보니, 곳곳에서 바람타고 날라온 잡초의 종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3. 잔디깎기 기계:

더 무덥기전에 아침 일찍, 인터넷에서 20만 정도 주고 산 보쉬 잔디깎기 기계 등장시켰습니다. 깎인 잔디를 담아주는 보관통이 커서 한번 작동시키면 오래동안 끌고 다닐 수 있어서 참 편리합니다. 게다가 몸통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많이 가볍다보니 여자인 제가 끌고 다니기에도 아주 적당한 무게입니다.

4. 돌 주의:

작은 연못 주위에 잡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면도기 하듯이 시원하게 쑥쑥 깎아보겠습니다. 덥고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깎고나서 깨끗하고 시원해진 잔디밭을 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작은 연못에는 하얀 수련이 피는데, 지금은 잠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연못에는 비단개구리와 미꾸라지도 살고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모기유충을 잡아 먹기에, 연못에 미꾸라지를 넣어주면 좋습니다.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미꾸라지를 넣어준 이후로 모기 개체수가 훨씬 줄어든 것 같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밖에 한번만 나가면 기본으로 8, 9방 물렸는데, 지금은 2,3방 밖에 안 물립니다. ㅎㅎ

사진상에서는 큰 차이가 잘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쓱쓱 밀리는 잡초를 보면 참 홀가분해집니다. 연못 주위 큰 돌 옆의 잡초는 나중에 손으로 직접 제거해줘야 합니다. 잔디깎기의 칼날이 돌에 닿으면 많이 무뎌지므로, 큰 돌은 피해가면서 깎아줍니다.

5. 잔디길이:

전원생활 초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전원생활 고수인 주인님은, 제 손이 느리다고 야단칩니다. 빨랑빨랑 일하고 간식이나 내놓으라고 호통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미국 같은 경우는 잔디가 12센치 넘으면 빨리 깎으라고 동사무소같은 곳에서 경고장이 날라온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는 냥아치들이 빨리 깎으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솜방망이로 때릴 지도 모릅니다.

 

6. 칼날 바로 잡아주기:

위이잉 두둑, 기계에서 비명 지르는 소리가 나서 보니, 자갈에 걸렸습니다. 이미 휘어진 칼날이 더 휘어진듯 하여 아빠를 불렀습니다. 임시로 펜치로 칼날을 펴고 나서 다시 작업을 시작합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자갈에 칼날이 많이 무더져 올해까지만 사용하고 내년에는 칼날만 교체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끝:

1시간 정도 걸려서 기본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돈 된 지금의 이 잔디밭 모습이 제가 전에 가끔 내려올때 봤던 그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사람의 정성이 깃들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그 잔디밭 말입니다. 그때는 모르고 예쁘게 보였고, 지금은 알고 예쁘게 보입니다.

작은 주인님이 어슬렁 거리면서 잔디가 잘 깎엿는지 점검하고 있습니다. 점점 햇살이 따가워지고, 저도 온몸이 땀으르 흠뻑 젖었습니다. 다음 잔디깎기 까지 천천히 자라줬으면 좋겠습니다. 전원생활 초보의 시골 삶이 또 하루 지나갑니다.

 

 

 

개복숭아 효소 만드는 방법

 

 

개복숭아 수확시기:

어쩌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나서 처음 도전하는 개복숭아 효소 입니다. 시골집 앞 공터에 마침 개복숭아 나무가 두그루 있었습니다. 개복숭아 수확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6월중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벌레가 먹게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게다가 씨가 여물면 씨앗에서 독성이 나온다기에, 씨가 여물기전에 수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나름 일찍 딴다고 6월 22일 토요일 땃는데 이미 하얀 진액이 묻어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이미 벌레가 들어있다는 뜻이므로 이런 것들은 바로바로 패스하고 깨끗한 것만 땁니다.

개복숭아 딸 때 주의할점:

통통한 열매들이 잔뜩 열렸습니다. 개복숭아 딸때 주의할점은 장갑 필수착용입니다. 안 그러면 복숭아 특유의 까슬까슬한 털 때문에 가려울수가 있습니다. 참 따는 와중에 친구한테서 문자가 와서 일하는 중이라고 사진을 보내줬더니 매실 따냐고 그러더라구요. 참 비슷하게 생기긴 했네요. 유일하게 다른 점은 매실은 털이 없고 매끈하다는 점입니다.


개복숭아 씻는 방법: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깔끄러운 털 제거하기에 여간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꼭지는 꼭 따주는 것이 좋습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효소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합니다. 참, 깨끗하게 씻은 개복숭아를 체에 담기 위해서는 먼저 고양이를 들어내야 합니다. 그 작업을 몇번이나 반복해야 합니다. 작은 고양이 들어내고, 큰 고양이 들어내고, 다시 작은 고양이 들어내고....

개복숭아 물기 제거:

깨끗하게 씻은 개복숭아는 햇빛에 30분 정도 널어놓았더니 물기가 싹 제거되었습니다. 집에서 담그시는 분들도 체에 담아서 물기를 꼭 제거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효소 담그기:

효소 만드는 방법은 참 쉽습니다. 개복숭아와 설탕을 1:1 비율로 잘 섞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나중에 윗부분은 설탕을 듬뿍 덮어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3개월 정도 숙성시킨 다음 걸러서 6개월 정도 더 발효시키면 몸에 좋은 효소가 만들어진답니다. 처음 며칠은 하루에 한번씩 뒤섞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짠! 너무 쉽게 만들어졌으니 이젠 마무리로 개복숭아의 효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양이도 쉽게 만들수 있을만큼 쉬운 것 같습니다.

개복숭아 효능:

1. 기관지 질환: 잔기침이 자주 나고, 목이 쉽게 쉬거나, 가래가 많은 사람들, 또는 담배를 피는 분들이 보통 3개월 정도만 먹어도 기침이나 가래가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니코틴 제거 효과에 뛰어남으로 흡연자, 비흡연자한테 다 좋습니다.

2. 노화방지: 개복숭아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여 피부 노화에  방지해주고, 어린이 아토피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3. 피로회복: 비타민 B와 C가 풍부하여 신진대사를 활발히 해주고 특히 혈액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활성산소를 줄여주기에 피로회복에도 탁월한 효과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4. 다이어트: 개복숭아는 100그람당 35칼로리에 불과하기에, 다이어트에도 좋고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있어 변비해결에도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5. 항암작용: 폴리페놀 성분이 들어있어 발암물질의 하나인 니트로소아민을 억제한다고 합니다.

6. 독소배출: 개복숭아에 들어있는 아스파라긴신은 해독작용이 뛰어나 숙취해소, 노폐물 배출 등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상, 어쩌다 전원생활, 개복숭아 효소 담그기 첫 도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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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깎기 (전원생활)  (29) 2019.06.24

고양이 키울 때 필요한 10가지 준비물

 

1. 고양이 집

자기영역을 중시하는 고양이에게 집은 필수조건입니다. 물론 집사랑 같은 공간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집사랑 함께 침대에서 잠을 잘수도 있지만, 가끔 혼자서 여유를 누릴만한, 쉬어갈 고양이만의 집이 있어야 합니다.

종이박스로 집을 만들어줄 경우, 박스지붕이 있는 상태에서 박스 옆면에 구멍을 뚫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고양이 스스로가 몸을 숨길수 있는 형태의 협소한 공간을 좋아하는 특성때문입니다.

2. 화장실 (모래)

스스로 세수하고 스스로 몸관리하는 고양이는 깨끗한 동물입니다. 그런 깔끔할 고양이에겐 자신만의 전용화장실이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더러운 걸 싫어하는 특성때문에, 자기의 배설물을 안 보이게 덮어버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양이 화장실엔 모래를 담아줘야 합니다. 고양이가 배변을 하고 나서 안 보이게 덮을 수 있는 정도의 양으로 말입니다.

고양이 배설물을 몇번 모았다가 한번에 버려주기보다는 바로바로 치워주는 것이 더 좋아합니다. 안 그러면 고양이로부터 더러운 집사라고 비난 받으면서 침대에서 똥테러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고양이 화장실

 

3. 밥그릇+ 물그릇

고양이도 먹고 살아야하니 밥그릇 물그릇은 당연한 조건이겠지만, 특히 물그릇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양이는 물을 적게 마시므로 신장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대체로 많은 동물입니다. 따라서 고양이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물그릇을 여러개 놓아, 수시로 물과 친해져 자주 물을 마시게 해줘야 합니다.

4. 전용 이동장

고양이가 아픈 경우는 없으면 좋겠지만, 예방접종을 위해서라도 동물병원에 방문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고양이는 낯선 환경에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동물이므로, 목줄을 해서 안고 간다든가 하는 경우에 돌발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가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동장에 넣어서 데려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고양이 이동장

 

5. 빗 (털손질)

고양이 스스로도 구르밍이라고 하는, 털손질을 하지만 고양이 혀가 가닿지 못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리고 털갈이 시기가 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털이 빠지게 됨으로 고양이 스스로 감당하기엔 벅찹니다. 집사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자주 빗으로 털을 고르게 빗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고양이가 너무 많은 털을 삼키게 되어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고양이의 구토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집사로선 보고 있기에 마음이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6. 장난감

장난감은 집사와 함께 하는 놀이로서 집사와의 유대감도 이어줄 뿐만 아니라, 고양이의 사냥본능도 일깨워주게 됨으로, 집사님의 고양이를 아주 멋진 근육냥이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새의 깃털, 오뎅꼬치, 반짝이는 공 같은 것을 흔들어주면, 집사님의 고양이가 얼마나 사냥에 능한 맹수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고양이 장난감

 

7. 이름표 (목걸이)

아주 안 좋은 상황, 즉 택배 받는 사이 잠깐 열어놓은 문으로 고양이가 밖으로 나간다든가 같은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경우을 대비하여 고양이의 목걸이에 집사님의 전화번호 같은 것을 남겨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8. 스크래쳐

고양이는 아주 예리한 발톱을 가지고 있고, 수시로 그 발톱을 다듬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발톱을 긁을만한 스크래쳐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집사님의 벽지, 소파같은 값비싼 물품들이 운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스크래쳐

 

9. 고양이 칫솔

고양이의 치석제거를 위하여 칫솔질을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아가 나빠지면 고양이가 뽀드득뽀드득 사료 먹는 것이 힘들어져 안 좋은 상황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집사의 사랑

이 모든 것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당연히 집사님의 사랑입니다. 숍에서 장난감 사듯이 사다가, 싫증나면 내다 버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책임이 따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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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나무 타는 이유  (41) 2019.06.20

고양이는 왜 높은 곳을 좋아할까요?

 

댕댕이한테는 푹신한 방석 혹은 집이 필요하지만, 고양이한테는 캣타워가 필요합니다. 캣타워가 있어도 냉장고나 선반 위로 뛰어오르는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님들은, 늘 높은 곳을 점령한 주인님들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고양이는 대체 왜 그럴까요? 왜 높은 곳을 좋아하고, 왜 나무를 오를까요?

고양이의 나무 타기


1. 고양이는 공간을 수직으로 느낀다.

집사가 사는 집이 아무리 넓어도, 고양이는 공간을 평면으로 느끼지 않고 수직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 넓은 방에 수직적인 물체, 즉 고양이가 올라갈만한 수직적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실은 자기가 엄청 좁은 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양이는 의자위, 소파위, 침대위, 냉장고위, 선반위, 바닥하고 수직적인 거리감이 있는 공간이면 최대한 올라가고자 합니다.

집사님들의 방이 실제로 좁더라도, 고양이가 올라갈만한 높은 캣타워, 혹은 캣타워를 대신할 냉장고 하나만 있더라도, 집사님의 고양이는 충분히 넓은 집에서 행복하게 지낸다고 생각할겁니다. 그러니까 고양이를 위한 타워를 만들어주시면 좋습니다.

정원냥 혹은 마당냥, 또는 밖에 사는 길냥이들은 캣타워 대신 나무를 탑니다. 더 높은 나무일수록 고양이한테는 더 고급 빌딩이므로 더 신나게 탈겁니다. 저희집 정원냥이들은 정원에 나무가 많다보니 이나무 저나무 갈아타면서 즐깁니다. 사람으로 치면 고급 빌딩을 여러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부자냥입니다.

2. 높은 곳에서 사냥감을 노린다.

사냥감이나 주변 등을 탐색하기 좋아하는 야생의 본능입니다. 높은 곳을 점령하고 내려다보는 느낌, 어쩌면 우월감, 또 어쩌면 누구보다도 멀리, 누구보다도 먼저,  누구보다도 넓게 탐색하고 미리 예견할 수 있는 그런 위치, 사람도 그런 위치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돈도 더 많이, 권력도 더 높이, 명예도 더 높은, 그런 곳의 위치에 서 있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마음 먹은대로 다 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할 수 있습니다. 캣타워를 타면 됩니다. 나무를 타면 됩니다. 냉장고 위로 뛰어오르면 됩니다. 고양이들은 그 높은 곳에서 자기 발밑의 집사 또는 댕댕이 또는 마당의 들쥐의 움직임을 탐색하면서, 오늘 저녁엔 어떤 간식을 먹을까 하는 여유를 즐길 겁니다. 고양이에게 나무는 행복한 안전지대인 것입니다.

나무위의 고양이

3. 모든 고양이가 높은 나무를 좋아한다?

저희 집에는 정원에서 산책하는 집냥이 셋과, 정원에 밥먹으로 오는 들냥이 여럿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높은 나무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두마리 뿐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 둘은 아주 미끈한 날씬냥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날파람이 있으려면 몸집부터 날씬해야 봅니다. 뚱냥이, 돼냥이들은 나무 타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정원에 놓여있는 의자위, 큰 바위위 정도는 올라가줍니다.

나무를 타려면 발톱으로 나무를 꽉 잡고 몸을 위로 훌쩍 들어올려야 하는데, 그 작은 발톱으로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기에는 무리인가 봅니다. 고양이도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4. 고양이가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아요?

혹 밖에서 높은 나무에 앉아있는 고양이를 보시고 , 고양이가 내려오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안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소리내어 부르면 고양이가 두려움을 느끼고 내려오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사람들의 불안이 담긴 목소리를 고양이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내려가도 괜찮겠다고 마음 먹을때까지 나무에서 몇시간째 꼼짝않고 내려오지 않다가 사람들이 사라진 밤이 되면 스스로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고양이를 믿으세요. 그들은 하나같이 김연아만큼 유연하며 심지어 현기증도 느끼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을 피해 급히 나무위로 몸을 숨기려고 도망간 새끼 고양이 같은 경우는 예외일수가 있습니다. 만약 주위에 엄마 고양이가 있으면 사람이 없는 경우, 나무에 올라가서 새끼 고양이를 물고 내려오거나, 엄마 고양이가 나무를 내려오는 시범을 보여주면서 새끼 고양이더러 따라 내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엄마 고양이가 없고, 새끼 고양이가 혼자 나무위에서 울고 있을 경우, 도움을 필요로 할수도 있습니다. 사다리 같은 도구를 이용해 구해줘야 합니다.  

나무타는 고양이

실은 구구절절 늘여놓았지만, 실제로 고양이가 왜 그러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고양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고양이는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그 자체로 귀여운 존재, 심장에 치명적인 존재, 집사를 부리고 사는 존재, 완벽한 존재입니다. 고양이가 왜 그러는지 굳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지금처럼 고양이를 모시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집사님들은 위대합니다! (무이네 소통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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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울 때 필요한 10가지  (43) 2019.06.21


『재미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연구』,

최미정, 인터북스, 2010.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p51 각기 다른 이민의 시기와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의식이란 바로 경계인, 이방인 의식이다. 뿌리 뽑힘, 고향상실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들의 작품은 삶의 뿌리가 뽑힌 고향상실자가 진정한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제자리이며 고향에이 동경과 회귀는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다. 고향상실자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복귀하려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기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것과 같다. 결국 근원의 문제, 동일성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와 같다.

김정기, 최정자, 김윤태

장석렬

고향은 주로 과거 지평위에 존재하며,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제시된다

고향은 미래 지평 위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현재의 삶은 불안과 소외의 공간이다

새로운 고향 만들기가 중요하다

4명의 시인은 그들의 작품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뿌리 뽑힌 자로서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극복하고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1. 김정기 시인- 신앙을 통해 근원적 고향을 회복한다

 

가을날/ 한 잎 낙옆되어/ 나 태어난 땅위에/편히 누우리/

한솔기 바람 내 몸을 흔들어/ 인디안의 거친 들판이나/

대륙의 거친 진흙밭에/ 딩굴어/ 어둠으로 삭아진들/마지막 말 한마디 삼켜진들/어떠리

어디나/그 크신 분의 품이니/어떠리/어떠하리. -<낙엽되어> 전문

기독교는 지상의 모든 인간을 낙원을 상실한 자로 간주한다.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을 타향처럼 생각하며, 언젠가는 천국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소망한다. 그들은 모두 지상에서 천국이라는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도정에 있는 것이다. 시인은 종교를 통해, 잃었다고 발버둥 치며 슬퍼할 것도 없고 지금 가지고 있다고 영원히 내것인 양 놓치 않으려고 움켜쥐고 있는 것도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시인은 고향과 타향을 가르지 않고, 스스로를 유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을 장소에 묶어둘 수도 있고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시인은 신앙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어디에도 자신이 쉴 땅이 없다고 토로했던 그가 이제는 모든 곳이 다 고향땅인 것 처럼 느낀다.

 

2. 최정자 시인 - 관계 맺음을 통하여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 획득

 

한국에서 떠나온지 십삼년/ 미국에서 살아온지 십삼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나의 강산은 변하고도 남았겠다/

이민 와서 십년 지나면/알러지에 걸린단다/ 나는 알러지에 걸렸을 뿐이다/

어제는 된장찌개/ 오늘은 김치찌개/ 앞으로 십년 넘어 더 산다더라도/ 같은 것을 먹겠지/

손톱발톱 머리카락까지 변함없는/ 오십 몇년전의 나/ 나는 한국이다/

내가 한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나는 걷고 또 걷는다/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됨으로...-<나는 한국이다 1> 전문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에도 많은 지인이 생기고 그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시인은 혼자라는 소외의식 극복한다. 또한 헤어져 살던 가족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이제는 또 다른 서울, 즉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성을 뉴욕에서 획득한다.

시인은 어디에서 살든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유전자를 지닌 한국 사람임을 당당히 선언하듯 말한다. 시인은 "내가 한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내가 두 발자국 걸으면 거기가 한국이고," 그리하여 "걸으면 걷는대로 모두 한국이 된다"고 한다.

 

3. 김윤태 시인- '사랑'을 통해 타향에 뿌리를 내려 고향으로 만든다

 

민들레 씨앗이/ 날다가 내리면/

민들레는 거기서/ 집을 짓는다/ 불가사의는/ 이론으로 알 수 없는 신비/

세상은 어딜가나/ 정들면 고향이라 하여선지/

민들레는 거기서/ 꼭/

집을 짓고/ 노란 꽃을 피운다 - <이민> 전문

민들레 씨앗은 그것이 날아온 곳이 고향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어세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는 가이다. 시인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어딜 가나 고향"이라고 한다.

이민자의 삶은 마치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것처럼 늘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다. 타지에서 오래 산다고 그곳이 고향이 되는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굳에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시인은 낯설겜ㄴ 여겨졌던 세상과 인간에 대해 점차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늘 손님처럼 떠돌던 삶도 차츰 뿌리를 내려 안정감을 갖게 된다.

 

4. 장석렬 시인- 자아와의 화애 및 고향 모색

 

봄이 가까이 오면 이곳에도 샛바람 끼어 불어/ 꽃 피는 한 철 분주가 시작된다/ 겨우내 먼 길 걸어와 피곤한 사람들/ 그러나 외길이었기에 눈망울은 맑다/ 대륙과 섬 사이를 멋대로 오가는 갈매기 보며/ 두고온 반쪽 하늘과/ 거기 어두운 구름의 얼굴을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조국은 영원 저쪽의 이름/ 밤새워 애처롭게 소중하게 붙들고 온 것 같은데/ 지금은 깨어난 꿈조각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낯선 색깔의 얼굴들이 낯선 바람을 안고 도는/ 직각의 거리 모퉁이에 서서/ 작고 따뜻한 소원들이 아랫목 온돌같이 무르익는/ 둥근 치마 저고리의 넉넉한 공간을 생각한다/ 이 거리 어느 곳 나의 발목 굳게 세워볼/ 낯익은 온기를 기대하는 무작정 같은 희망/ 머리를 숙이면 강물 흐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고/ 어디쯤일까, 강물처럼 가다보면 닿게 될/ 안마당 꽃향기 가득한 대문간이/ 멀리 고향 봄하늘 보푸라기처럼 뽀얗게 떠오른다- <입춘 외길> 전문

70년대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고향상실을 경험한 시인에게 고향은 고향으로서의 의미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려 더 이상 실제적인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시인은 타향의 고향화를 통해 고향을 모색한다.

구세계와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고향 모색, 이는 앞선 세명의 시인의 고향과의 연결 속에서, 고향을 닮은 '타향의 고향화'를 만드는 것과 다르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다를까 ??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5.5. ~ 1883.3.14.

마르크스

 



철학의 역사에는 체계를 만드는 데 능한 자와, 그것을 부수는 데 능한자, 두 가지 유형의 철학자가 있는데, 마크르스는 그 두가지를 다 잘했다. 흔히 아는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세계 지도를 양분한 거대 이념이다. 좁은 의미로서의 철학의 틀을 뛰어넘어 정치, 경제, 사회사상을 총망라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배웠고,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으며, 그 무렵에 만난 평생 친구이며 동지인 엥겔스(1820-1895)의 권유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고 그의 필생의 대작 [자본론]을 완성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철학은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흔든 두 개의 역사적 사건, 곧 프랑스 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에 대한 독일 철학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처럼 사회의 모든 악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에서 비롯된다고 바라본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공동체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문명 이전의 상태로 상정되는 자연상태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상적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타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한 낭만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명명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공산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 짓는가? 지배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아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도 그 차이를 인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과학과 사회법칙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를 향해, 특히 지배 계급을 향해 사회개혁을 호소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은 그들이 아직 유토피아적 명제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게 바뀌라고 호소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이 계급 대립을 초월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통한 공산주의 실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속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우리 스스로의 모순부터 개선해서 뭉치자는??) 그래서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웅변조로 외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 공산주의에 또 다른 이름을 하나 붙여주었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다.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달리 ‘과학’이 될 수 있는 근거로 ‘역사적 유물론’을 거론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붙인 이름이다.)


역사적 유물론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헤겔의 철학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을 180도 거꾸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헤겔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과 정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정신의 다른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이다)

 마르크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은 인간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물질이 아니다, 역사를 유물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훔볼트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베를린 대학의 현관 벽에 붙어있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유물론의 성격은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사유의 진리, 다시 말하면 사유의 현실성과 힘은 실천의 문제다”.


엥겔스




헤겔은 역사를 전개하는 원동력을 정신으로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생산력을 꼽았다. 모든 시대는 생산력의 성격에 부합하는 생산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생산 관계가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조응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는 항상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면 위기가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생산 관계가 생산력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질곡이 되면 사회혁명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생산 관계에는 다섯 가지 기본 양식이 존재한다. 원시 공동체, 노예제도, 봉건제도,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노동 가치의 착취가 사회혁명을 일으킨다는 마스크스가, 지금 세상에 살면 뭐라고 할까? 점심 밥은 굶어도 커피는 스타벅스 마시는ㅋㅋ)


결국, 마르크스 이야기는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성의 이야기다. 또 뻔한 말이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점도 있고 허점도 있는 철학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난 어린 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진을 볼때마다 늘 마르스크를 엥겔스로 생각하고, 엥겔스를 마르크스로 착각했다. 가난한 하층계급 출신인 마르크스는 깡마르게 생겼을 것이고, 부유한 엥겔스는 넙적 둥그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편견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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