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서 나눔하기/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지라르의 욕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닮고 싶어하는 인물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광고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광고로 나올 때, 평소에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이내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그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연예인이 샀던 물건'이 된다.

지라르는 이 한마디 쉬운 명제를 위해서 아주 어려운 말로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논리를 펼친다. 전에는 학자들이 왜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줄로 요약해주기만 바랬다. 그 한줄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듣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것은 사과다"라는 한줄의 명제만 듣고 싶었다. 그것이 사과가 되기 위하여, 어떤 씨앗에서부터, 어떤 토양과 어떤 시간을 거쳐 어떤 열매로 자라나서, 다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어, 이름을 얻어 세상에 공개되는지, 그것이 사과가 아닌 것에서 사과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고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학자들은 한줄의 명제를 얻어낸 그 과정을 풀이해서 정리해주는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제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흠흠) 아래에 펼치는 해석들은 그것을 공부해서 정리한 작업이 되겠다.

1. 욕망의 개념:

욕망라캉에 의해 정신분석학의 핵심 용어로 부각된 개념으로서 이에 해당하는 프로이트의 용어는 소망(Wunsch)이다. 프로이트의 소망 개념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함께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인 욕망(desire)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캉의 욕망은 언어, 상징계의 작용으로 도입된 결여, 혹은 절대적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는 욕망은 항상 자신의 대상에서 빗나가며, 결여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소망 충족이 직면해야 하는, 무의식적, 역동적(dynamical) 갈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라캉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구조적(structural)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라캉은 욕망 속에 내재한 이러한 결여의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원용한다. 라캉에게 욕망은 결여를,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를 의미한다면, 요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될 것을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상징계에 속하고, 요구는 상상계에 속한다. 요구가 어머니의 절대적 "현존"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라면, 욕망은 그것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 욕망이다. 여기에서 ''라는 조사는 목적격과 주격으로 각각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인간은 타자 '' 욕망한다.(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여기에서 욕망의 대상은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달리 말하면 나에 대한 타자의 인정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라캉은 욕망이 인정 혹은 승인과 같은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인간은 타자''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인간(주체)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역시 욕망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한다. "나는 타자이다." 그러므로 라캉에서의 욕망의계, 상징계로의 진입은 타자에 의한 소외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기 라캉에게 욕망은 욕망과 향유의 두 개념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후기에 라캉은 대타자에 의한 소외로서의 욕망과 대타자로 인한 소외로부터 벗어난 만족으로서의 향유라는 개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소외의 극복은 결여로서의 욕망, 혹은 잉여 향유의 주체적 전유를 통해서 달성된다.

2. 욕망의 간접화

지라르는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삼각형으로 도식화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돈키호테가 스스로 되고자 욕망한 것은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이다. 그런데 그가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전설적인 기사를 모방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주체'라면 아마디스는 '중개자'이고 이상적인 기사는 '대상'이 된다. 돈키호테의 욕망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자연발생적인 '수직적 초월의 욕망'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중개자(médiateur)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간접화된 욕망"이다. 이처럼 중개자를 통해서 암시를 받고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 삼각형의 욕망 이론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주체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부른다. 지라르는 이 이론을 통해 현대 시장경쟁 체제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욕망을 설명하려 한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개자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주체대상이 있을 뿐이어서 소설의 주인공이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에 대한 욕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이 경우에 그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것은 간단한 직선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욕망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무의식의 표현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직선 위에 주체와 대상을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삼각형의 욕망이 또 있다. 돈키호테를 중개자로 삼는 판초이다. 물론 산초의 욕망에는 돈키호테를 모방한 욕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돈키호테를 통해 자기가 통치자가 될 하나를, 자기 딸이 공작부인 칭호를 얻는 욕망을 갖는다. 물론 그러한 욕망들을 산초에게 암시해 준 것은 돈키호테이다. 이 경우에 흔히 중개자의 영향이 작용하는 순간부터 현실감각은 사라지고 판단력은 마비된다. 이러한 경우를 "욕망의 간접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저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체와 대상만을 설정한 소설에 익숙한 낭만적 독자들은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 사이에 있는 대립관계 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러한 대립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중개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중개자를 설정하지 못한 소설을 "낭만적 거짓"으로 보고, 삼각형 욕망을, 즉 중개자의 영향이나 중개자에 대한 모방이나 복사를 설정한 경우를 "소설적 진실"로 파악했다.

3.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

외면적 간접화는 라캉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면,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하는 방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내면적 간접화는 "주체가 중개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라르는 스탕달의 복사와 모방을 "허영심"으로 규정한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지 못하고 타인에게서 빌려온다. 허영심은 그 대상의 명성이나 부를 모방한다. 이 경우 중개자는 경쟁자가 되어 그 경쟁자의 실패를 기대한다.

돈키호테와 산초와의 물리적인 거리는 인접해 있지만 정신적 거리가 떨어져 있고, 그 둘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 주인의 욕망의 대상을 하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는 외면적 간접화이다.

그러나 스탕달의 경우 주체와 중개자가 동일한 세계의 내부에 인접해 있다. 이를 내면적 간접화라고 한다. 외면적 간접화의 경우 중개자를 공개적으로 존경하고 스스로 그 제자임을 자처할 수 있지만, 내면적 간접화의 경우, 자랑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춘다. 주체는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갈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순종적인 존경심""가장 강렬한 원한"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된다. 존경심은 그 중개자가 자신보다 우월하기 때문이고, 원한은 중개자가 경쟁 상대이고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오"라고 부른다, 이 증오를 지닌 주체는 자동적으로 증오심을 감추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증오한다.

그러나 주체는 중개자가 경쟁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맞서서 그 증오를 드러내기 위해 논리적인 순서나 시간적인 순서를 도치시킨다. 자신의 욕망이 경쟁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그 때문에 그 불화의 책임이 경쟁자한테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이다. 질투나 선망도 원한이나 증오와 마찬가지로 내면적 간접화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래서 중개자를 틈입자나 난처한 자, 거북스러운 제삼자로 여긴다. 나아가 질투자는 오히려 자신을 불행한 희생자로 자처한다.

대상을 보고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 욕망을 일깨웠을 뿐이지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욕망이 중개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언제나 간접화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중개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개자의 존재를 감춤으로써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종속이 강화될 뿐이다. 욕망의 근원이나 주체와 중개자와의 상관성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소설은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그것이 중개자가 없는 진정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욕망의 주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이다. 중개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을 소설적 진실이라고 하는 이유는 욕망이 간접화되어 그 욕망이 가짜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라는 것이다.

 4. 죽음과 수직적 초월

욕망의 진실은 죽음이지만, 죽음은 소설의 진실은 아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인 결말에서 멈추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결말들이 작위적이고 조급하며 소설작품의 겉치레로 사용되었다고 판단한다. 세르반테스의 결말 또는 스탕달의 소설의 결과 역시 죽음에서의 전환이다. 돈키호테는 그의 기사들을 버리고, 쥘리앵은 그의 반항을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초인을 단념한다.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 형이상학적 욕망 포기에 있다. 죽어가는 주인공은 그의 중개자를 부정한다. 중개자를 부인한다는 것은 신성 포기하는 일이며, 자만심 포기하는 일이다. 주인공의 육체적인 쇠퇴는 자만심의 패배를 표현하는 동시에 감춘다신성을 포기함으로써 주인공은 예속도 포기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전도가 일어나고, 형이상학적 욕망의 모든 결과가 그 반대의 결과로 바뀐다. 거짓말은 진실로, 고뇌는 추억으로, 동요는 안정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모욕은 겸손으로, 타인을 모방한 욕망은 자신에게서 우러난 욕망으로, 굴절된 초월 수직적 초월 대체된다.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결말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언제나 진정한 전환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스탕달은 주관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호주관적 면을 더 강조한다. 쥘리앵은 고독을 획득하지만 고립을 이겨낸다. 반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결말에서 고립을 이겨내지만 고독을 쟁취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맛보지 못하던 평화를 느낀다.

소설의 결말들 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대립보다는 강조의 이동이 중요하다. 차이점을 강조하면 소설 결말들의 통일성을 놓쳐버리기 쉽다.

낭만적 비평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을 거부한다. 즉 형이상학적 욕망을 초월하여 죽음 너머로 빛을 내뿜은 소설의 진실로 향하기를 거부한다. 주인공은 진실에 도달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자신의 선견지명을 유산으로 남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이겨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인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주인공과 그의 창조자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분리되어 있다가 결말에서 서로 합쳐진다. 죽어가면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피상적인 것과 의미심장한 것,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의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소설작품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위계는 우리에게 작품의 본질적인 어떤 면을 볼 수 없게 해준다. 우리는 소설가가 기독교인이 아닐 경우 이 상징주의를 순전히 장식적인 역할로 간주하고, 소설가가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순전히 호교론적으로 본다. 정말로 과학적인비평이라면 선험적인 모든 판단을 버리고 소설의 다양한 결말들간의 놀라운 일체에 주목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편견인 찬반이 미학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 사이에 방수 격벽을 세우지 못한다면, 새롭게 조명된 창작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종교적 문제를 피상적으로 논의하지 말되, 가능하면 그것을 순전히 소설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잔디깎기

 

1. 잔디밭 관리

서울에 살 때는 일년에 한 두번 친구들이랑 양평에서 바베큐 파티 하면서, 그림같은 전원주택에서 매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잔디는 스스로 예쁘게 자라서, 알아서 파아랗게 그림을 만들어주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나서, 상상과 현실사이의 괴리는 생각외로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잔디밭 관리였습니다.

2. 잔디깎기 시기:

6월 1일날 올해 들어서 세번째로 잔디를 깎았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어지럽게 자라있습니다. 10년이 다 된 잔디밭이다 보니 곳곳에 다양한 잡초들도 참 많이 나있습니다. 게다가 잔디밭이 고양이들의 놀이터다보니 남들이 사용하는 잡초제거제도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뽑거나, 잔디깎기로만 관리를 하다보니, 곳곳에서 바람타고 날라온 잡초의 종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3. 잔디깎기 기계:

더 무덥기전에 아침 일찍, 인터넷에서 20만 정도 주고 산 보쉬 잔디깎기 기계 등장시켰습니다. 깎인 잔디를 담아주는 보관통이 커서 한번 작동시키면 오래동안 끌고 다닐 수 있어서 참 편리합니다. 게다가 몸통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많이 가볍다보니 여자인 제가 끌고 다니기에도 아주 적당한 무게입니다.

4. 돌 주의:

작은 연못 주위에 잡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면도기 하듯이 시원하게 쑥쑥 깎아보겠습니다. 덥고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깎고나서 깨끗하고 시원해진 잔디밭을 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작은 연못에는 하얀 수련이 피는데, 지금은 잠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연못에는 비단개구리와 미꾸라지도 살고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모기유충을 잡아 먹기에, 연못에 미꾸라지를 넣어주면 좋습니다.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미꾸라지를 넣어준 이후로 모기 개체수가 훨씬 줄어든 것 같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밖에 한번만 나가면 기본으로 8, 9방 물렸는데, 지금은 2,3방 밖에 안 물립니다. ㅎㅎ

사진상에서는 큰 차이가 잘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쓱쓱 밀리는 잡초를 보면 참 홀가분해집니다. 연못 주위 큰 돌 옆의 잡초는 나중에 손으로 직접 제거해줘야 합니다. 잔디깎기의 칼날이 돌에 닿으면 많이 무뎌지므로, 큰 돌은 피해가면서 깎아줍니다.

5. 잔디길이:

전원생활 초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전원생활 고수인 주인님은, 제 손이 느리다고 야단칩니다. 빨랑빨랑 일하고 간식이나 내놓으라고 호통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미국 같은 경우는 잔디가 12센치 넘으면 빨리 깎으라고 동사무소같은 곳에서 경고장이 날라온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는 냥아치들이 빨리 깎으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솜방망이로 때릴 지도 모릅니다.

 

6. 칼날 바로 잡아주기:

위이잉 두둑, 기계에서 비명 지르는 소리가 나서 보니, 자갈에 걸렸습니다. 이미 휘어진 칼날이 더 휘어진듯 하여 아빠를 불렀습니다. 임시로 펜치로 칼날을 펴고 나서 다시 작업을 시작합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자갈에 칼날이 많이 무더져 올해까지만 사용하고 내년에는 칼날만 교체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끝:

1시간 정도 걸려서 기본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돈 된 지금의 이 잔디밭 모습이 제가 전에 가끔 내려올때 봤던 그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사람의 정성이 깃들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그 잔디밭 말입니다. 그때는 모르고 예쁘게 보였고, 지금은 알고 예쁘게 보입니다.

작은 주인님이 어슬렁 거리면서 잔디가 잘 깎엿는지 점검하고 있습니다. 점점 햇살이 따가워지고, 저도 온몸이 땀으르 흠뻑 젖었습니다. 다음 잔디깎기 까지 천천히 자라줬으면 좋겠습니다. 전원생활 초보의 시골 삶이 또 하루 지나갑니다.

 

 

 

개복숭아 효소 만드는 방법

 

 

개복숭아 수확시기:

어쩌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나서 처음 도전하는 개복숭아 효소 입니다. 시골집 앞 공터에 마침 개복숭아 나무가 두그루 있었습니다. 개복숭아 수확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6월중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벌레가 먹게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게다가 씨가 여물면 씨앗에서 독성이 나온다기에, 씨가 여물기전에 수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나름 일찍 딴다고 6월 22일 토요일 땃는데 이미 하얀 진액이 묻어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이미 벌레가 들어있다는 뜻이므로 이런 것들은 바로바로 패스하고 깨끗한 것만 땁니다.

개복숭아 딸 때 주의할점:

통통한 열매들이 잔뜩 열렸습니다. 개복숭아 딸때 주의할점은 장갑 필수착용입니다. 안 그러면 복숭아 특유의 까슬까슬한 털 때문에 가려울수가 있습니다. 참 따는 와중에 친구한테서 문자가 와서 일하는 중이라고 사진을 보내줬더니 매실 따냐고 그러더라구요. 참 비슷하게 생기긴 했네요. 유일하게 다른 점은 매실은 털이 없고 매끈하다는 점입니다.


개복숭아 씻는 방법: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깔끄러운 털 제거하기에 여간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꼭지는 꼭 따주는 것이 좋습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효소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합니다. 참, 깨끗하게 씻은 개복숭아를 체에 담기 위해서는 먼저 고양이를 들어내야 합니다. 그 작업을 몇번이나 반복해야 합니다. 작은 고양이 들어내고, 큰 고양이 들어내고, 다시 작은 고양이 들어내고....

개복숭아 물기 제거:

깨끗하게 씻은 개복숭아는 햇빛에 30분 정도 널어놓았더니 물기가 싹 제거되었습니다. 집에서 담그시는 분들도 체에 담아서 물기를 꼭 제거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효소 담그기:

효소 만드는 방법은 참 쉽습니다. 개복숭아와 설탕을 1:1 비율로 잘 섞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나중에 윗부분은 설탕을 듬뿍 덮어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3개월 정도 숙성시킨 다음 걸러서 6개월 정도 더 발효시키면 몸에 좋은 효소가 만들어진답니다. 처음 며칠은 하루에 한번씩 뒤섞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짠! 너무 쉽게 만들어졌으니 이젠 마무리로 개복숭아의 효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양이도 쉽게 만들수 있을만큼 쉬운 것 같습니다.

개복숭아 효능:

1. 기관지 질환: 잔기침이 자주 나고, 목이 쉽게 쉬거나, 가래가 많은 사람들, 또는 담배를 피는 분들이 보통 3개월 정도만 먹어도 기침이나 가래가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니코틴 제거 효과에 뛰어남으로 흡연자, 비흡연자한테 다 좋습니다.

2. 노화방지: 개복숭아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여 피부 노화에  방지해주고, 어린이 아토피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3. 피로회복: 비타민 B와 C가 풍부하여 신진대사를 활발히 해주고 특히 혈액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활성산소를 줄여주기에 피로회복에도 탁월한 효과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4. 다이어트: 개복숭아는 100그람당 35칼로리에 불과하기에, 다이어트에도 좋고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있어 변비해결에도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5. 항암작용: 폴리페놀 성분이 들어있어 발암물질의 하나인 니트로소아민을 억제한다고 합니다.

6. 독소배출: 개복숭아에 들어있는 아스파라긴신은 해독작용이 뛰어나 숙취해소, 노폐물 배출 등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상, 어쩌다 전원생활, 개복숭아 효소 담그기 첫 도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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