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독서하기/ 제 1권
『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알에이치코리아, 2014.
1장, 진보는 시끄러운 깡통
2장, 보수는 답답한 꼴통
3장, 현실정치 똑바로 보기
4장, 정치는 우리 삶의 문제이다
P13/ ‘보수는 부패 때문에 망하고 진보는 분열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부패는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친 기업쪽, 돈이 도는 동네에는 여유가 있고 그것을 만지다보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타성에 젖어 부패로 가기 쉽다. 반면 없는 쪽, 기업이나 재벌과 거리가 먼 동네에는 부패할 거리조차 없다.
그러면 진보는 왜 분열할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토대를 둔 보수는 현재 눈에 보이는 길을 가면 그만이지만, 진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외쳐야 한다. 누가 옳은지 어찌 알수 있겠는가, 정답이 없으니 주장도 제각각이다. 이것이 어쩔수 없는 진보의 특성이다.
P17/ 보수는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진보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모른다. 민간이 불법사찰, 국정원 개혁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보수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내게 닥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 뿐이다. 진보가 그들의 삶에 득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싸워줘야 ‘저들이 내편을 들어주는구나’ 하고 힘을 보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정국이 보수가 짜놓은 틀대로 흘러가는 데에는 진보 세력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
P18/ 미국의 정치학자 E.E.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말했다. 정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만약 나만 옳다고 확신한다면 민주주의는 필요없다.
진보는 자신이 옳은 쪽, 선한쪽이라는 믿음이 교조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보 진영에 팽배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거 때마다 어떻게 박근혜에게 표를 줄수 있느냐식의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유권자에게 투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관점이 아닌 누가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가리는 관점에서 “왜 박근혜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대중을 욕할 것이 아니라, 진보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35/ 김대중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 사회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처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되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상인처럼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인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P67/ 민생 없이 개혁 없다
P77/ 안철수 모범생 말고 모험생이 되어라/문제는 리더십이다, 자기극복의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약점들을 스스로 대오 각성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103/ 문재인은 착한 후보였다. 선한 눈망울과 따스한 인상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치는 좋은 이미지와 선한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정치는 단순한 선의가 아닌 실행 가능한 리더십과 게임플랜, 그리고 비전과 사람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선함에서 멈추면 안 된다. 착하되 좋은 후보가 아니었다면, 문재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세력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평범한 국회의원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정치인이 몰락하는 것은 외부적 변수 때문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외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 안에서 곪아터져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한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극복, 자기성장의 진통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한 차원 높은 정치로 가지 못한다.
P107/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사림, 그중에서도 노론이 대한민국 보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중 300년 가까이 집권한 노론은 조선 말 나라를 잃자 곧 친일파로 변신한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중심의 통일 노선과 충돌하는 이승만 중심의 단정 노선의 주축이 되는데 이들이 바로 친미세력을오 발전한다. 이처럼 노론, 친일, 단정, 친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력이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 보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로 들어오며 이들은 ‘성장’이란 아젠다를 앞세워 산업화 세력으로 발전한다.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보수의 존재 이유가 됐다.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다. 그들은 스스로 정통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보수는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가 되고 있다. 이런 낡은 가치관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이끌어갈 수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P151/1인자의 리더십과 2인자의 리더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는 단 한명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게 혼자서 다 할수 없는게 이치다. 그래서 좋은 리더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2인자는 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도 정도전과 황희, 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바로 2인자에 속한다. 이성계와 정도전 중 과연 누가 조선 왕조의 창업을 주도했을가?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왕, 즉 1인자는 이성계가 됐다. 또 유비를 촉나라의 왕으로 만든 것은 제갈공명이다. 그가 없었다면 언감생심 유비는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지도자는 옆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한지의 유방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유방은 동네에서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건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전략 참모 장량, 행정 참모 소하, 전쟁 참모 한신을 만나 한 왕조를 세웠다. 유방 스스로도 못난 자신이 귀족의 아들인 항우를 한 왕조를 창업할 수 있었떤 것은 이 세사람을 곁에 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264/이젠 주연만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다. 역할은 조연이지만 그 개성이나 존재감, 인기는 주연을 앞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도 이제는 sns를 통해 거대 매스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수평적 네트워크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엔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권위주의나 일방적 강요는 먹혀들기 어렵다. 따라서 리더십도 시대 흐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유재석이 보여주는 진행 스타일(부드러운 카리스마),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리더십 스타일은 시대 흐름에 정확하게 부합해야 한다.
백조가 물 위에 떠 있으면 물 위는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물 아래는 정신없이 바쁘다. 푸른 호수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부유물이 떠다닌다. 정치 과정도 이와 같다. 더러운 연못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정치판도 온갖 귀찮고 더럽고 사소한 것들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가의 덕목이고 소양임을 알게 된다. 나 혼자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민주주의요,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의 위험은 중독성에 있다. 권력은 손잡이 없는 칼과 같아서 만지는 사람의 손을 베고 만다. 유능한 정치인은 악마와 계약을 맺을 정도로 유연해야 하고 권모의기질도 가져야 하지만 그 위험에 잠식당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윤리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윤리는 보통 아예 악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지만 정치에서의 윤리는 악을 활용할 줄 알되 악에 물들지 않는 것, 바로 책임윤리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지란 말처럼 쉽지 않다. 지도자의 길이란 이처럼 어렵다. 인간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권력을 써야하는데, 그러다 보면 권력에 중독되어서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기 쉽다. 김종필은 “권력은 50%만 써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 국민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처럼 냉철한 의식과 변별력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들은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다. 잘못된 지도자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뜻이 얼마든지 왜곡될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결국 국민보다는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 지도자 한 사람이 완벽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하겠는가, 지도자의 윤리적 감각이 튼튼하기를, 처음부터 뛰어난 행정능력을 지닌 사람이기를 기대하고 뽑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허망할 제도일 것이다. 그 결과는 고작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느날 갑자기 정치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는건 로또 당첨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정치가 달라지면 그때 정치에 관심을 갖겠다는 자세는, 쇠붙이가 썩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를 바꾸려면 보통의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정치인의 놀이로 왜곡돼지 않고 보통사람의 일상이 된다.
지금 이 순간, 멍하니 있으면 정치는 내 삶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바꾸려면, 우리 뭐라도 하자.
독재자 엄석대를 쫓아낼 담임선생님 같은 구세주는 세상에 없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라들이 좋은 유권자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자기 삶을 바꾸는 방식은 한계가 와 있다. 노력해도 안 된고 로또도 안 된다. 권위주의 시대처럼 출세한 지인에게 빌붙은 것도 별 소용이 없다. 이제는 사회적 해법밖에 없다. 사회적 해법의 핵심이 결국 정치다. 아니면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