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정치학-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부르디외, 홍성민, 현암사, 2012.

 

피에르 부리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홍성민 지음


p38 부르디외의 서문은 칸트에 대한 비반으로부터 시작한다.

플라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창조, 예술이란 결국 자연을 모방할 뿐(재현),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이데아의 세계가 보편자로서 존재

아리스토텔레스

모방은 인간의 창조적 본능, 자연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예술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즐거움.

사물내에 개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바로 보편성을 갖는다

보편성과 개체성의 대립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논쟁의 핵심 대상이었다.

근대 사상사에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

 

칸트


● 개인들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일차적으로 감각판단에 의존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개체적인 감각판단은 반성적 판단으로 귀결되어 보편적 미학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개체적인 감각판단 → '반성적 판단' → 보편적 미학

그 이유를 칸트는 사람들은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시말하면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이 혹은 신분을 떠나, 똑같이 미적 쾌락을 느낄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순수 이성이 자연의 법칙과 같이 인간성에 본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판단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키는 공통감각은 인간 본연의 능력이라 본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이러한 칸트의 미학 이론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림이나 자연 풍광을 보면서 느끼는 감성들은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 계급적이란 말은, 한 사람의 미학적 취향이 교육과 훈련에 따라서 다르게 길들여진다는 점을 가리킨다. 게다가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으로 옳음/그름의 형식으로 작용하도록 강제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

미학적 판단의 궁극적 기원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

진리, 윤리, 미학은 완전히 분리된 서로 다른 영역이다

부르디외

미학적 판단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 / 미학적 취향은 현실세계에 대한 도덕-윤리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교육 수준의 정도가 예술에 대한 고급 취향/ 대중 취향을 구별하는 계기가 되며, 거꾸로 예술에 대한 취향이 계급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도 있다.

서로 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일상 생활의 실천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국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계급 지배를 유지시키고, 상층계급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기제이다. 이렇게 보면 한 사회에서 상식적인것으로 인정된 평가의 범주를 바꾸고 이를 통해서 사회 세계 자체를 바꾸는 것이 계급투쟁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

 

디아스포라의 지식인-현대 문화연구에 있어서 개입의 전술

레이초우 / 장수연, 김우영 옮김 / 이산 2005


p25/ 근대 서양 제국주의 역사에서 중국은 외국의 식민세력에 완전히 지배된 적이 없었다. 표면적으로 없었다고 해도 인민이 겪은 고난을 감안할 때 중국의 경우를 덜 '제3세계'인 것으로 볼수 없다.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민지배자는 그들 자신의 정부이다. 그들 자신의 체제와 그들 자신의 언어와 그들 자신의 문제를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지식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서양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며, 문화적 생산은 구조상 단순히 적대적이기보다는 나르시시즘적이다. 거기에 적대적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중국 유산, 중국의 전통, 중국정부" 그리고 이것들의 변종을 향한 적대감이다.

p31/ 마오주의자들은 프로이드와 라캉의 '결여' 개념을 이용하여, 암스트롱과 테넌하우스가 "표상으로서의 폭력"이라 부른 "타인을 대신해서 말하기를"정당화한다. '결여', '서발터니터', '희생'과 같은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들먹이면서 자신의 타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 결과적으로 피억압자에게서 항의와 정당한 요구의 말까지 박탈해버린다.

p33/ 디아스포라 의식이란 역사적 우연이라기보다는 지적인 현실, 즉 지식인이 처한 현실상황이 아닐까. 국경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타당성과 소유의 문제이다. 국경과 관련하여 실천할수 있는 일 하나는 현존하는 타당성의 개념을 파괴하고 대체하고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타당성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경개념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장(field)이라고하는 공간적 개념의 필수적 수반이다. '장'의 개념은 '헤게모니'(어떤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와 유사하다. 장의 형성은 자기 문화를 사회의 모든 수준에 전파할 수 있는 지배적 집단의 출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p40/ 2차 세계대전시기 중국과 영국은 자신이 필요할 때 홍콩에 재정적 또는 다른 형태의 원조를 요구했지만 홍콩인의 행복을 고려하진 않았다. 이러한 주변적 위치는 홍콩인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관찰자적 특권을 만들어내고 억압의 이상화에 회의를 품게 했다. (조선족도 관찰자적 특권을 갖고 있지 않을까?)

p 43/ 1997년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때, 홍콩은 '모국'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식민권력에 양도될 것이다.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란 용어는 원래 유대인의 민족적 이산(離散) 상황을 뜻하는 용어지만, 오늘날에는 전쟁·식민화의 역사나 경험과 깊이 결부된 난민·이민 상황을 가리키며, 본래의 의미보다 넓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제임스 클리퍼드는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 국민국가/동화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긴장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토착적, 특히 자생적 주장과도 긴장관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디아스포라는 끊임없이 현재 살고 있는 장소와 고향/고국 사이의 뒤엉킨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국경을 초월한 다른 문화와의 느슨한 절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지역의 역사나 문화의 본질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절충주의나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그 두 가지를 옹호하는 근대에 대항하여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성을 갖는 개념인 것이다.


레이 초우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홍콩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미국의 브라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홍콩인'으로서,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레이 초우는 자신이 '타자'로서 응시를 받아왔던 경험에 근거하여 '타자'의 시선으로 권력자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내 옷 밑에는 더 이상 드러낼 비밀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 비밀이란 건 너의 환상일 뿐이야"라고.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이 초우가 소개하는 자기의 경험이 반영된 에피소드 하나는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율을 느낄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논문은 한 학회에서 내가 불참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내 글에 대한 토론자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문화대혁명을 경험한 본토의 중국인]이었다. 그 발표문에서 나는 중국어를 번역하면서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이 실수를 꼬투리 잡아 그 토론자는 논문 전체를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청중에게 결국 "그녀는 홍콩 출신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이처럼 나의 지리적 기원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표명한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홍콩에서 온 이 서양화된 중국여성, 이 문화적 사생아가 어떻게 중국과 중국지식인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만약 내가 중국을 대표한다거나 진정한 중국인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면 수치심에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숨어 있는 문화적 폭력을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어야만 했다. 중심주의적인 거대한 억압을 경험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와 같은 사람이 그런 중심주의의 영속화에 그토록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현대중국과 오늘날 그 밖의 모든 지식인이 도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전략화된 현실의 으뜸가는 예이다. "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우리의 주변에도 이런 문제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실업자, 특정지역, 그 밖의 수많은 소수자—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미셸 푸코의 말처럼 지식인을 권력의 대상이자 도구로 전환시키려는 권력형태에 맞서서 저항할 수 있는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스스로를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지식인조차도 자신의 학식과 말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지식권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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